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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세상보기] 베니스식 선택 '9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97년 12월18일 아침 신문의 제목은 지금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신문은 "선택의 날은 밝았다" 라고 쓸 것이다.

언론 보도는 흥분에 들뜨겠지만 유권자는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때로 마음을 바꾸지만 바보만 안바꾼다" 는 얘기가 있는 반면 '두번째 결정의 90%는 틀린 선택이다' 라는 말도 있잖은가.

선택은 필연적으로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를 만들어 낸다.

그날의 중대한 국가적 행사인 15대 대통령선거와 연관지으면 당선자 1명 (선택받은 자) 과 낙선자 1명 (선택받지 못한 자) 이 나올 것이다.

즉 1등과 2등이 생긴다는 얘긴데, 이 두사람으로써 선택의 필요.충분조건은 다 갖추어진다.

비록 10명이 출마하더라도 1등을 제외한 2등부터 10등까지는 2등과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한사람만 뽑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택을 기다리는 대열에는 두 사람만 서 있으면 충분하다. 그런데 1, 2등의 축에 끼지 못할 인사들, 다시 말해 3등이 확실한 인사들이 이 대열에 굳이 참여하려는 이유는 뭘까. 이것이 바로 97년 한국 대선의 수수께끼다.

4인이 출마한 선거를 두번이나 치르고도 왜 그것이 수수께끼냐고? 3등 낙선자도 자기 생각에는 1등을 할 것으로 착각했고 그 착각은 지금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3명을 놓고 선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포오셔의 선택' 을 보자.

중세 베니스의 아름다운 처녀 포오셔는 3개의 궤를 내놓고 구혼자들에게 마음대로 고르라고 한다.

그중 하나에는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 있다.

이 초상화가 든 궤를 선택하는 구혼자가 부유한 상속녀이자 총명하고 아름다운 이 아가씨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애라곤의 왕이 먼저 고른다.

납으로 만든 첫번째 궤에는 "나를 고르는 자는 재산을 내놓고 운명을 걸게 되리라. "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청년 왕은 납에 운명을 걸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중얼거린다.

황금으로 만든 두번째 궤에는 "나를 고르는 자는 만인이 소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고 적혀 있다.

그는 어중이 떠중이들과 동렬에 끼는 것이 싫다고 이것도 마다한다.

은으로 만든 세번째 궤에는 "나를 고르는 자는 신분에 응당한 것을 얻으리라. " 이렇게 적혀 있다.

이미 충분하게 고귀한 자신의 신분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도리라고 여긴 이 구혼자는 은궤의 뚜껑을 연다.

속에서는 눈을 껌뻑거리는 어릿광대가 혀를 내밀고 있는 그림이 튀어나온다.

거기에는 뚜껑에 쓰인 문구가 똑같이 적혀 있다.

바보로 취급당한 왕은 화를 내며 퇴장한다.

뒤이어 친구간에 의리가 깊은 청년 바사니오가 등장한다.

이 씩씩한 청년은 금은 탐욕스럽고 허식에 찬 것이라고 거부한다.

은도 역시 천박하다고 물리친다.

납은 소박한 것이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며 그것을 선택한다.

뚜껑을 여니 포오셔의 초상화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 2막과 3막에 나오는 이 포오셔의 선택이 낭만적이라고? 천만의 말씀. 분수에 맞게 선택한 애라곤 왕도 '너무 머리를 굴려 선택을 잘못했다' 는 포오셔의 조롱을 받는다.

제대로 선택한 바사니오도 겉은 초라하나 속은 다를 수 있다는 불확실한 희망 아래 납궤를 선택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오는 12월엔 어떡하나. 심각하게 생각할까, 남을 따라갈까, 수수한 쪽을 고를까.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베니스식 선택을 꼭 강요받아야만 하는가.

9월6일의 전망으론 그럴 것 같으니, 아 정치가 원망스럽다.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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