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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다이애나와 한국적 정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남의 나라 이혼녀가 한사람 죽었다.

물론 평범한 이혼녀는 아니다.

15년간 영국의 왕세자비였고 장차 영국왕이 될 왕자들의 어머니인 여자다.

세계는 온통 그녀의 죽음앞에 떠들썩하다.

각국 정상들이 "더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며 애도의 전문을 속속 보낸다.

유명 스포츠 스타들이 경기에 앞서 묵념을 올리고 보스니아에 주둔중인 NATO 병사들은 조기를 게양해 슬픔을 표했다.

세계인들의 마음속에서 다이애나는 한낱 (?) 영국 왕세자의 이혼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동화를 되살려준 '현대판 신데렐라' .그녀는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일어나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강인한 여성으로 또다시 변신, 평범한 대중들의 스타로 자리매김해 왔다.

대인지뢰 금지운동이며 에이즈.심장병환자 돕기 캠페인을 위해 전세계를 누비며 다녔다.

다소 복잡한 (?) 사생활이 너그럽게 받아들여진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런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선은 좀 다르다.

한마디로 "천벌받아 마땅한 여자가 죽었는데 왜 이리 소란이냐" 는 것이 대다수 남성들의 정서다.

아무리 결혼생활이 불행했고 이혼을 했다고는 하지만 경호원에 승마교관.백만장자까지 섭렵한 여자를 죽은 후에도 떠받드는 외국인들의 행태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바람을 먼저 피운건 남편 찰스 왕세자가 아니었냐고? 남자가 한눈을 팔았다고 여자가 맞바람을 피우다니 가당치도 않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 여자들의 얘기는 딴판이다.

다른 여자에게 정신 팔린데다 성격도 고약한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다이애나는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들 한다.

오죽하면 거식증에 걸리고 자살기도까지 했겠냐면서 "모처럼 만난 사람과 딸하나 낳아 잘 살아보겠다더니…" 하며 혀를 끌끌 찬다.

다이애나의 죽음을 싸고 전세계의 관심이 '국민의 왕세자비' '세계의 여성' 이라는등 고인의 행적과 위상을 재평가하는 일에 쏠리는 가운데 한국민들은 유독 케케묵은 남녀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다.

중년 남성의 68%, 여성의 20%가량이 외도한 경험이 있다는 '바람난 나라' 사람들의 자연스런 감정이입일까. 아니면 뿌리깊은 유교적 잣대를 남의 나라 왕세자비에게까지 휘두르려는 것일까. 어젯밤 늦도록 "잘 죽었다" "남자가 먼저 죽었어야지" 라며 싸움을 벌인 가정이 많았다는 얘기에 떠오른 생각이다.

신예리 생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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