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기억의 강물 찾아낸 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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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훈 할머니' 가 '남이 엉가' 로 되돌아 와 친동생 순이씨를 만나 얼굴을 맞대고 울며 서로 쓰다듬고 있는 사진이 실린 새벽에 배달된 신문을 문간에서 보고는 차를 몰고 회사로 오면서 나는 줄곧 아리랑을 불렀다.

여름 휴가를 사흘 얻어 아내와 나는 우리 둘 모두의 고향인 마산에 들렀다.

고향에 사는 친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아내의 환갑날을 동갑내기 고향 친구이기도 한 우리 둘이서만 보내기로 말은 안 했으나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처가족이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 집으로 가는 골목 입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 골목이 맞다 싶어 갔으나 번번이 아니었다.

혼자 남아 있던 장모가 이 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해온 후 30년동안 마산은 그만큼 변해 있었다.

겨우 찾아냈을 때는 아내가 울먹이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나는 내 마음으로 미루어 울먹이지 않을 수 없는 아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여름날 밤 바닷가를 친구들과 쏘다니며 놀다가 끝에는 우리 둘만 처져 이 골목 입구까지 오곤 했다.

우리는 철저한 가난과 황폐한 절망뿐이던 6.25전쟁과 그 직후 50년대 한국의 젊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가 우리의 가엾은 과거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억 속의 젊은 날의 우리한테서 늙어가는 오늘의 우리를 용서받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구마산 동성동 거리를 떠나면서 나는 운전대에 앉아 훈 할머니를 생각했다.

"그의 힘으로 고향을 찾아낸다는 것은 틀린 일이다.

하물며 자기 고향이 마산인지, 인천인지도 모를뿐 아니라 자기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 사람이 이렇게 통째로 산천도, 사는 사람도 다 바뀌어버린 고향을 눈으로 보아 어떻게 찾아내겠다는 말인가" 하고 한탄했다.

진동에서 차에 기름을 채우는 동안 마산 시내보다 더 많이 변한 그곳을 보며 훈 할머니를 위해, 그리고 나와 아내를 위해 나는 마산에서 맛보았던 것보다 더 진한 슬픔을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다.

'일본국 정부' 에 의해 군대 위안부로 꽃봉오리 어린 나이에 강제 징집돼 무참히 몸과 마음 전부를 짓밟혔던 훈 할머니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망각의 레테 강물을 살아서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강물을 마신 다음 모여 사는 나라일 수도 있다.

수치 때문만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나선 길에서도 우리는 레테의 강물을 마셨다.

좀 나은 생활 형편을 만들어 보려고, 분단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고, 박정희 (朴正熙).전두환 (全斗煥) 군사독재에 항거하려고, 마르크스주의와 김일성 (金日成) 주체사상에 한번 꾀어 들어갔기 때문에, 정치 권력을 잡아보려는 목적에서, 이래 저래 우리는 죽은 사람만 마신다는 망각의 강물을 마셨다.

'남이' 를 찾으려고 그에 앞서 기억의 므네모시네 (Mnemosyne) 강물부터 찾아 나섰던 것은 한국으로부터, 혹은 자신인 '남이' 로부터 의식과 무의식 모두에서 영원히 잊혀지기로 작정하고 캄보디아에서 인생의 마지막 황혼을 보내던 훈 할머니 자신이 가장 먼저였다.

이 할머니를 만난 한국인 황기연 사장, 현지 한국 대사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열성적으로 취재했던 각 언론사 기자들, 국내의 독지가들, 그 다음에는 그의 올케 조씨와 친동생 순이씨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제일 마지막에는 가장 우뚝하게 유전자 생물학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킬링 필드' 의 무대였다는 점 말고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땅 캄보디아에서 시작해 이 거대한 계시 (啓示) 는 완성됐다.

이 과정에는 아무 예상도 필연도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발견한 므네모시네 강은 이제 한국민 전체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소리 높여 외치며 흐르고 있다.

한국 사람들아, 이 강에 뛰어들어 그 물을 마음껏 마시자. 과거가 현재를 잃어버렸든, 현재가 과거를 잃어버렸든 이 둘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서로 흐르게 하자. 기억의 므네모시네 강은 실은 망각의 레테 강 바로 옆에서 나란히 흐르고 있다.

이 사실을 알아낸 것은 수천년 전의 저 지혜로운 그리스 신화였음에도 감사를 보낸다.

<강위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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