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유의원-산부인과'건물 80여년 역사 가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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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30년전엔 전주에서 행세께나 하는 사람치고 우리집 마당을 안 밟아본 사람이 없었제. "

전북도청 뒷문을 나서면 오른쪽에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이 눈에 밟힌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다 못해 퇴색한 벽과 갈색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난 건물.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한 자리 국번의 전화번호가 적힌 간판이 이 건물의 역사를 알려준다.

문앞에 걸린 '유의원 - 산부인과' 라는 이 간판만이 이곳이 병원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 집을 두고 '이상한 노인 혼자 사는 흉가' 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집이 한때는 도지사 부인들이 자주 찾던 산부인과였던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집은 80여년전인 1910년대초 지어져 해방때까지 일본인이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으로 분류된 이 집을 차지한 사람은 張씨로만 알려진 한 상인이었다.

그뒤 한국동란이 끝난 1953년 현재의 주인 유주봉 (劉朱鳳.87) 원장이 인수했다.

경성제대 (현재 서울대)에서 의학을 공부한 劉원장은 방이 9개나 되는 이 집을 산부인과로 개조했다.

마침 이 집이 도지사 관사 (현재 전북경찰청 민원실 자리) 와 담 하나를 두고 이웃하고 있어 지사 가족들과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자연스레 지사 부인들의 건강을 돌보는 주치의 (?

) 역할까지 하게 됐다.

그뿐아니라 지금은 아름드리 감나무와 잡초만 가득한 마당에선 저녁마다 가든파티가 열려 전주지역 유명인사들의 사교장 역할까지 했다.

아내와 아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10년전 청진기마저 놓은 劉원장은 요즘 전주실내빙상장을 찾아 얼음을 지치며 소일한다.

전북무주 태생으로 70년대 전북빙상연맹 회장을 지낸 劉원장의 스케이트 사랑은 남다르다.

劉원장은 60년전 논 두마지기를 주고 산 영국제 스케이트를 지금도 신고 타며, 전주에 빙상장이 없던 시절엔 격일로 서울까지 올라가 여름철 스케이팅을 즐겼다.

"세월 많이 변했어. 옛날엔 도지사 관사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우리집 감을 많이 따먹었는데 지금은 흉가라며 거들떠 보는 사람 하나 없어. " 劉원장은 무성하게 달린 마당의 풋감을 지그시 바라보며 옛날을 회고했다.

전주 = 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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