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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야스쿠니 합사, 유족은 싫다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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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일본 법원이 일제 침략을 미화하는 데 앞장서 온 도쿄 야스쿠니(靖國)신사의 일방적인 전몰자 합사(合祀) 행위가 문제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오사카(大阪)지방재판소는 26일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한 일본인 군인·군무원 11명의 유족 9명이 “신사의 합사자 명부에서 이들의 명단을 제외해 달라”며 제기한 소송을 기각했다고 교도(共同)통신이 보도했다. 무라오카 히로시(村岡寬) 재판장은 “합사라는 종교적 행위에 대해 불쾌한 심정이나 신사에 대한 혐오 감정은 법률로 평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2006년 8월 “고인을 경애·추도하는 인격권이 침해됐다”며 정부와 신사에 1인당 100만 엔씩 총 900만 엔의 위자료 지급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오사카 법원은 자위대원의 합사 거부 소송을 판례로 적용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1988년 “합사는 신사의 자유로운 결정이어서 유족이 주장하는 인격권은 법적 보호 대상이 아니다”고 판결했다.

야스쿠니에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국내외 전쟁에서 사망한 전몰자 246만여 명이 합사돼 있다. 유족들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멋대로 명부를 만들어 놓고는 군신(軍神)으로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과 한국인 희생자 2만1000여 명도 포함돼 있다.

이번에 소송을 낸 유족들에게는 일제의 광적인 전쟁에 끌려나가 희생된 아버지·할아버지의 영혼이 전쟁을 미화하는 야스쿠니에서 추모받고 있는 점이 상당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대다수 한국인 유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국 정부와 유족도 한국인 전사자들을 명부에서 빼 달라고 요구해 왔지만 신사 측은 거부하고, 일본 정부는 “정교 분리 원칙 때문에 신사 업무에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판결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크다. 신사 측의 입장만 반영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소송이 제기돼 있는 도쿄와 나하(那覇) 지방재판소 판결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유족이 싫다는데 억지로 합사해 놓은 것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고, 개인의 명예를 침해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비약일 수 있으나, 남의 집 사람을 자기 조상이라고 모시면서 매년 제사 지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 보수적인 일본 법원이 합사 분리 판결을 할 경우 벌어질 사회적 파문을 우려해 이런 판결을 내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일본 법원이 계속 진실을 외면하는 한 잘못된 역사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김동호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