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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속 '환상체험' 새바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최면에 걸려 7달 동안 사선 (死線)에서 헤매다 액체로 녹아버린 사나이, 인어와의 사랑을 이루고자 영혼을 내던진 어부, 저승에서 살아온 사람의 도움으로 공주와 결혼하는 착한 청년,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만 탐욕스런 사람은 죽음으로 내모는 악마의 병….

세계 문호 (文豪) 들의 환상소설을 묶은 '낡은 극장에서 생긴 일' 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문학세계사刊) .그레이엄 그린.한스 안데르센.헤르만 헤세.오스카 와일드.찰스 디킨스등 문외한에도 익숙한 작가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출판계에 '환상문학' 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영어로 '판타지' (fantasy) 로 표기되는 환상문학은 실제 있을 것 같으면서도 현실에선 찾기 힘든, 즉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가리킨다.

민담.신화.공상과학소설 (SF) 등의 요소를 끌어안고 논리적 사고 같은 인간 이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중층 (重層) 을 드러내며 서구에선 일찍부터 독립된 문학장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국내문단의 평가는 그동안 인색했던 편. 때로는 공포.SF의 동의어로, 때로는 문학성이 결여된 괴기소설로 분류됐다.

이같은 고정관념에 '메스' 를 들이대는 본격 환상문학의 번역.창작이 최근 활기를 띠고 있다.

황금가지의 '환상소설 전집' 이 대표적인 경우. 독일작가 E T A호프만의 '사랑의 묘약' 과 영국작가 M D러셀의 '영혼의 빛' 이 나왔다.

전자 (前者)가 수도사와 정부 (情夫) 라는 이중생활로 고통받는 사람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신비롭게 그렸다면 후자 (後者) 는 예수회 신부의 우주여행을 얼개로 신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앞으로도 20여종이 속간될 계획. 국내 창작물도 활발하다.

최근 나온 백민석의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문학과지성사) .제목에서 느껴지듯 현실과 상상이 뒤범벅된 16편의 단편을 묶었다.

사막에 숨어사는 물고기를 찾아나선 큐레이터, 어느날 돌연히 반인 (半人) 반식물 (半植物) 이 된 샐러리맨등을 통해 권태로 가득찬 일상사를 비꼰다.

송경아의 '아기찾기' 는 부영시 (浮影市) , 즉 '떠도는 그림자 도시' 라는 가상공간을 배경으로 자아 (自我) 의 근원을 찾아나선 두 남녀의 모험담 (민음사)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도 살인보조업자라는 비현실적 인물을 내세워 삶의 무의미성을 그렸다 (문학동네) . 국내 환상문학은 이처럼 신예작가들이 주도한다.

좁게는 평면적 스토리와 플롯으론 담을 수 없는 90년대 한국사회의 복잡다단함에 대한 빗댐이요, 넓게는 과학문명의 밑에 깔린 이성적 사고에 대한 신세대들의 반기로 풀이된다.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 여름호와 '외국문학' 가을호도 환상문학을 특집으로 다뤘다.

문학평론가 황병하씨는 "환상문학은 현실도피나 탈출이 아니라 리얼리즘이 포착 못한 추상적.관념적 현실을 담아내는 미학체계" 라고 옹호했다.

'환상바람' 은 대중문학쪽에서도 거세게 불고 있다.

귀신들의 암투를 그린 이우혁의 '퇴마록' 은 3백만부가 넘게 팔렸고 (들녘) , 인간과 정령, 마법과 전설이 살아있는 가상의 대륙에서 펼쳐지는 젊은이들의 모험을 담은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 도 10만여부 나갔다 (무당미디어) . 또한 일본작가 미즈노 료 (水野良) 의 '크리스타니아' '마계마인전' '로도스 전설' 이 잇따라 번역됐고 (들녘) , 미연방수사국 (FBI) 의 미제 (未濟) 사건을 소설화한 'X - 파일' 시리즈도 선보였다 (시공사) . 특히 이들 환상물은 멀티미디어와 연계되면서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미즈노의 작품은 일본에서 만화.영화.컴퓨터게임, 나아가 팬시상품으로까지 활용됐고, 'X - 파일' 은 TV드라마로 인기가 높으며 인터넷 사이트도 8백여개에 달한다.

'퇴마록' 도 컴퓨터게임으로 출시됐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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