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결정에 승복하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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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에서 민주정치가 정착되려면 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양식있는 인사는 요즘 정치가 돌아가는 추세를 보고 정국이 정치적 혼돈, 무질서, 또는 무규범 상태에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체계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최근의 정국은 엔트로피의 극대상황, 즉 무질서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야간의 원색적인 정치 선전전, 지루한 비방과 중상등의 작태는 국민으로 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한다.

더구나 당내 갈등의 끊임없는 표출양상은 당내 민주주의가 제도화되려면 아직도 요원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특히 여당의 경우 심한 이전투구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어 한심스럽다.

당내는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구룡 (九龍) 들이 엉켜 뒤범벅의 게임을 벌이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당내 대의원들의 다수표를 얻은 후보가 대선 후보자로 확정됐다.

당내 경선결과에 승복하겠다고 공언한 정치인들이 그후 어떠한 언동을 보였는가는 국민이 잘 알고 있다.

당내 민주주의 원칙도 지킬줄 모르는 정치인들을 민주주의 신봉자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많은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민주주의, 다수결 원칙, 또는 타협에 의한 정치를 말하고 있으나 자신들 이익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중심적 아집 (我執) 과 독선적 배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당내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승복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정당들간 합종연횡에 일시적으로 동의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에게 다소라도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면 정당들간 합의를 쉽게 파기한 경우를 자주 목격해 왔다.

이렇듯이 정치인들, 그 중에서도 대선에 뛰어든 소위 지도급 정치인들이 상식이나 정치적 신의를 벗어나 거의 기본적인 규범의식도 없이 마구 행동한다면 민주주의 규칙이 준수되거나 민주주의의 관행이 정착될 수 없다.

여론조사 결과 일시적으로 다소 인기가 상승했다고 해 마치 국민의 다수가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국민 개개인의 의식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선호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이슈에 따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소 인기가 상승했다는 사실이 대선결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만일 당내에서 결정된 사항이나 관련 당사자들간의 합의가 준수되지 않는다면 정당인들간, 또는 정치인들간의 불신을 조장할뿐 당내 민주주의는 제도화될 수 없다.

당내 민주주의가 제도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정당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 문제는 건전한 정당정치의 실현에도 큰 장애가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어느 특정 정당내의 갈등 증폭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그 정당에만 국한된 문제라기보다는 이 나라 정당정치의 민주적 제도화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신한국당의 경선과정이 모처럼 민주적 절차에 의해 치러졌어도 그 결과에 대해 경선 참가자들이 승복하지 않는다면 당내 민주주의 틀뿐만 아니라 정당정치의 민주적 제도화도 더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오늘의 정치인들은 대선을 향한 경쟁을 치열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치러야 할뿐더러 그 결과에 대해서도 승복하는 관행을 만들어내야 한다.

민주주의는 결코 만장일치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닌만큼 다수결원칙에 의해 최선보다는 차선 (次善) 을 택할 수 있는 아량과 지혜가 필요하다.

만일 모든 국민, 또는 모든 정치인들의 완전한 합의에 의해서만 정치가 작동된다고 가정한다면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우리는 오늘의 정치적 혼란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민주주의는 질서와 혼돈의 벼랑 끝 사이에서 존재한다고 지적한 어느 체계과학자의 말을 다시 음미해 본다.

모든 국민은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라도 유아독선 (唯我獨善) 의 자세를 버리고 차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과 대아 (大我) 를 위한 자기 양보도 감수하는 자세를 보여주길 바라고 있다.

이용필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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