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록박정희시대]14. 박정희의 경제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대통령 박정희 (朴正熙)에게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의 경제치적에 매료돼 있다.

박정희의 대통령 재임시 보인 경제개발에 대한 열정과 목표달성을 위한 숨돌릴 틈 없는 밀어붙이기,치밀한 사후 점검등의 독특한 스타일은 그의 사후 (死後)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박정희의 경제관은 어떻게 형성됐으며, 경제개발의 모델은 어느 나라였을까. 그 저변에는 어떤 의식이 깔려 있었을까. 그와 지근거리에 있었던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 해보자. 62년 박정희 대통령권한대행이 가난한 조국을 한탄하던 술자리에서 대작하던 이동원 (李東元.71.현국민회의의원) 비서실장은 위로겸 아이디어를 냈다.

"각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영국도 우리처럼 국토가 좁고 자원도 없었지만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자원.자본.노동력을 외국에서 끌어들여와 오늘의 영국을 만들었습니다.

영국에서 배워야합니다.

" 그러자 듣고 있던 朴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뭐 영국까지 갈 필요가 있겠소. 가까운 일본에서도 배울게 많은데…. " 李실장은 해방후 연세대 학생회장으로 우익 학생운동을 하다가 유학,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한 인물. 朴대통령은 알다시피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본육사로 유학했던 일본군인 출신이다.

두 사람이 각각 영국과 일본을 생각한 것은 이런 유학경험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사실 朴대통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을 모델로 생각하고 있었다.

李실장에 앞서 5.16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시절 비서실장은 최근 포항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정치권으로 돌아온 '철의 사나이' 박태준 (朴泰俊.70.육사6기.당시 대령) 씨였다.

당시 朴의장은 朴비서실장을 불러 은근히 한마디 건넸다.

"朴실장, 거 말이야, 야스오카 (安岡) 라고 알지. 어떻게 연락이 안될까. " 야스오카 마사히로 (安岡正篤) .그는 당시 일본의 국사 (國師.나라의 큰 스승) 로 통하던 우익 한학자였다.

그는 도쿄 (東京) 대 정치학과를 나왔지만 동양철학, 특히 실학인 양명학에 깊이 심취했던 인물로 '동양중심 = 일본중심' 사상으로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 인명사전에 (1927년 당시 29세였던 그가) '금계 (金鷄) 학원을 설립해 일본정신을 고취했다' 고 나올 정도로 일찍부터 유명해진 그는 83년 숨질 때까지 일본 정계.재계의 막후실력자로 통했다.

46년, 48년 두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일본정계의 거물 요시다 (吉田) 총리도 취임연설문등 주요문안을 만들 때면 그에게 자문을 했고, 심지어 일왕 히로히토 (裕仁) 의 미국에 대한 항복문도 그의 검토를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朴비서실장 역시 일본 와세다 (早稻田) 대학에 유학한 일본통. 朴의장이 밀명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부연설명을 했다.

"야스오카는 유학 (儒學) 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아시아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거든. 한번 그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 " 박태준의원은 최근 인터뷰에서 "일본에 있던 대학동창등 인맥을 동원해 야스오카와 선이 닿아 편지를 몇번 전달했으며, 나중에는 이용희 (李用熙.81.전통일원장관) 서울대교수가 메신저 역할을 맡았다" 고 밝혔다.

일본의 국사로 추앙받던 야스오카가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朴대통령이 정권을 잡자마자 일본의 국사를 떠올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5.16 이전 박정희라는 인물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경제정책에 대한 별다른 구상은 없었다.

혁명주체의 한사람인 朴의원이 대령시절 쿠데타를 모의하던 朴장군으로부터 들었다는 경제구상. "나야 경제가 뭔지 잘 모르지만 일제시대부터 관리했던 사람, 은행에서 부장했던 사람도 있고, 미국에서 경제공부하고 온 사람도 있잖아. 다 끌어모아 하면 돼. " 구체성은 없고 왕성한 혈기만 느껴진다.

朴대통령이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괜히 쿠데타했다' 고 후회했음직하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이 있다고 주저앉는 성격이 아니었다.

61년 후반기의 어느날 그가 특유의 독기를 뱉으며 당시 최고회의 경제고문이었던 민간인 혁명주체 김용태 (金龍泰.72.전의원) 씨에게 한 말이 있다.

"앞으로 난 경제공부만 할거야. " 朴대통령은 특히 일본경제 공부에 열심이었다.

'일본경제사' 라는 딱딱한 책도 읽었고, 일본신문을 공수받아 스크랩하면서 꼼꼼히 읽었다.

일본의 역사책이나 역사 다큐멘터리 영화, 심지어 사무라이 영화까지 직접 대사관에 특명을 내려 가져다 봤다. 그중에서도 朴대통령이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일본의 근대화를 가능케 했던 메이지 (明治) 유신이다.

김정렴 (金正濂.73.전대통령비서실장) 씨는 朴대통령의 경제철학에 깔린 역사관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朴대통령은 일본육사시절 배웠던 일본사와 전사 (戰史)에 해박했어요. 朴대통령은 19세기 서구의 문물이 동방으로 유입되고 한국과 일본이 구미열강의 개방압력을 받았을 때 일본은 개방정책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이 됐는데, 우리 지도자들은 쇄국정책으로 문을 걸어닫은채 당파싸움만 일삼는 바람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19세기 사무라이 지사들이다.

결론은 간단해진다.

金씨는 "당파싸움 같은 내분을 일으키지 않고 메이지유신의 지사처럼 조국근대화에 나서 민족중흥을 이루는 것" 이 곧 朴대통령의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경제철학이라고 말했다.

10월유신 (維新) 의 뿌리이기도 하다.

朴대통령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더 필요하다.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전경제2수석) 씨는 "朴대통령은 중요한 일을 할 때면 군인으로 돌아간다" 고 말했다.

간단명료한 지시, 부연설명이 없는 상명하달,치밀한 점검, 그리고 숨돌릴 틈 없는 밀어붙이기등. 일본식 발전 모델에다 군인식 스타일이 덧붙여져야 박정희라는 인물의 경제관과 경제 운용방식이 제모습을 드러낸다.

일본식 발전모델의 특징은 자본주의체제이면서도 서구와 달리 민간사업이 국가사업처럼 민관 일체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일본 주식회사' 라고 부른다.

朴대통령은 '주식회사 대한민국' 의 사장, 또는 '경제개발전쟁' 의 총사령관같이 일했다.

60년대초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집행되고 있을 당시 朴대통령의 집무실에는 각 사업 (주로 1백여개 민간공장 건설) 의 진행상황을 기록한 대형 패널을 회전기둥에 묶어 한장씩 넘기면서 볼 수 있는 장치가 놓여 있었다.

군대의 상황판 같은 것이다.

매주 상공부 담당국장이 진행상황에 맞춰 상황판을 수정했는데, 朴대통령은 한장씩 넘겨보다가 예정보다 부진한 곳이 있으면 당장 전화기를 들어 기업인과 해당부서를 다그쳤다.

고도성장이 시작된 70년대초 "중화학공업추진자금을 만들라" 는 朴대통령의 지시에 남덕우 (南悳祐.73.전국무총리) 당시 재무장관이 인플레이션의 우려를 들어 반대했다.

이때 朴대통령이 한 얘기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을 보시오. 일본은 나라의 운명을 걸고 대동아전쟁을 일으켰어요. 전쟁에 졌는데도 오늘날 경제대국이잖소. 돈을 푸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거는 것도 아니고 경제의 일부를 거는 건데, 한번 해봅시다.

" 다시 일본얘기고, 전쟁얘기다.

朴대통령의 비장한 각오를 듣고 외면할 수 있는 장관은 없을 것이다.

南장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朴대통령은 이런 경제장관들을 매우 오랫동안 중용했다.

필요에 따라 썼다가 사정없이 연을 끊어버리는 정치권 인사들에 대한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경제학자 출신인 南장관은 69년부터 74년까지 재무장관, 78년까지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78년 12월22일 南장관이 공직을 물러나던 날 5.16직후 화폐개혁에 참여한 이후 17년간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을 도왔던 김정렴 당시 대통령비서실장도 함께 물러났다.

朴대통령은 이들을 그대로 떠나보내지 않았다.

金실장은 바로 주일대사로, 8일후 南씨는 朴대통령의 경제특보로 임명됐다.

오원철 경제2수석은 5.16직후부터 朴대통령과 연을 맺어 10.26 때까지 경제수석으로 청와대에 남아 있었다.

이 또한 일본식 '오야붕' 기질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예인은 자신의 음 (音) 을 들어줄 벗을 찾아 평생을 헤매고, 장부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던가.

이들 경제관료는 목숨을 걸고 메이지유신을 일으켰던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지휘관의 명령에 사지로 뛰어드는 병사들처럼 '주군 (主君) 이자 사령관' 인 朴대통령의 개발신화에 사로잡혔다.

특별취재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