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금호지구의 두얼굴]자본주의 실험하듯 상점 줄지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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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해항을 떠난지 4시간반만인 19일 오전1시30분. 한나라호 조타실 항로계기판의 빨간 램프가 깜박였다.

북한이 군사경계지역으로 부르는 이른바 '알파'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부터 북한영역이다.

오전7시, 간간이 뿌리는 비와 바다안개 속에서 북한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남 금호지구 경수로 부지와 12㎞정도 떨어진 양화항. 부두에는 길이 1백여m 남짓한 어판장이 보였으나 인적은 없었다.

'경애하는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를 사수하자' 는 낡은 페인트 글씨만이 눈에 들어왔다.

녹슨 철선 10여척도 보였다.

경수로 건설공사 때문에 임시로 설치된 양화항 세관에는 5명의 북측 세관원이 일하고 있었다.

일부 취재진의 망원 카메라등 취재장비 통관을 놓고 작은 승강이가 있었지만 입국수속은 비교적 간단하게 끝났다.

세관통과뒤 만난 첫 북한주민은 음료와 담배등을 파는 외화벌이 상점 '양화카운트' 여점원. 평양에서 왔다는 점원은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했다.

대표단은 최근 경수로 부지공사를 위해 새로 닦은 진흙탕길을 30분정도 달려 한반도 15, 16번째 원전이 들어서는 금호지구에 도착했다.

텅빈 부두와 녹슨 10여척의 크고 작은 철선, 희뿌옇게 퇴색한 회색 건물들, 까까머리처럼 잡초가 무성한 가파른 야산, 그리고 곳곳에 큼지막한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선전구호들. 지난달말 이곳에 도착한 한 관계자는 "우리 기술자들이 우리 차량이나 장비를 몰고 작업하거나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가슴뿌듯하다" 면서 "북한주민들에게 상당한 상징적 의미와 문화적 충격을 주고 있는 것같다" 고 말했다.

오후2시30분. 착공식의 발파 스위치가 눌러졌고 경수로 부지 왼편에 가로놓인 어인봉 마지막 능선 6부 지점에서는 폭음과 함께 오색연기가 피어올랐다.

부지 한쪽에선 국산 굴착기가 북한땅에 최초로 삽을 꽂았다.

착공식후 리셉션이 열린 강상리 게스트하우스의 모습은 '여기가 과연 북한땅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경수로에 관계된 것 이외에는 찍지말라" 며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던 북측 안내원의 태도가 갑자기 유순해진 것도 이 때부터였다.

게스트하우스 앞에 'HYUNDAI' 'DAEWOO' 라는 상표를 달고 도열한 덤프트럭과 굴착기.불도저등은 북한주민들에게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시위하는듯 했다.

부지내에는 남북이 따로 없었다.

시공회사 관계자는 "함께 땀흘리고 일과후에는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면서 "남북 기술자들이 함께 술자리를 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 말했다.

적어도 실무자들간에는 경수로사업이 남북교류및 협력의 새장을 열게될 것이라는 기대가 현실화하고 있었다.

나진.선봉에 이어 이곳 신포에서도 자본주의 실험이 조심스럽게 진행되는듯 했다.

숙소가 들어설 부지옆에 설치된 평양 옥류관 신포분점과 외화벌이 상점등은 북한당국이 경수로사업을 계기로 외화벌이를 위해 구비한 것이다.

20일 오전10시. 북측 도선사의 안내로 양화항을 떠났다.

북측 도선사는 "자주 봐야 정들지요" 라며 인사했고 우리측 대표단은 "이제 자주 오겠습니다" 라고 화답했다.

북한땅 체류 만하루. 짧았지만 엄청난 변화를 감지한 시간이었다.

떠나는 한나라호 갑판에 올라서니 양화항의 오른편엔 경수로가 건설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 부지, 왼쪽으로는 마양도가 멀리 들어왔다.

마양도는 지난해 동해안에 침투했던 북한잠수함이 발진한 북한최대의 잠수함기지가 있다.

'전쟁과 평화' 가 묘하게 뒤엉킨 신포를 뒤로 하고 대표단은 남으로 향했다.

경수로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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