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임금협상 설명회 방해하다 쫓겨난 현대중 강경파 노조원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올 들어 배 한 척 수주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벌크선 두 척의 발주가 취소됐습니다. 당장 일감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기를 못 느끼면 악몽은 현실이 됩니다.”

23일 오후 5시50분 울산시 전하동 현대중공업 사내 체육관에서 올해 노조 임금협상안 설명회가 열렸다. 오종쇄(48) 노조위원장은 8000여 명의 노조원 앞에서 회사가 처한 경영위기를 설명했다.

현대중공업 오종쇄 노조위원장이 23일 오후 사내 체육관에서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2009년 임금협상 회사 위임’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부 강경 노조원이 이날 설명회를 방해하려 했지만 8000여 명의 다른 조합원이 이들을 제지했다. [뉴시스]


“위기가 닥치고 있는데 노조 지도부가 투쟁만 얘기하는 건 사기 행위입니다. 임금을 올리든 삭감하든 회사에 일임하겠습니다. 향후 3년간 고용이 보장되고, 사내 하청 근로자의 임금과 근로 조건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모든 걸 (회사에) 맡기고 동참할 생각입니다.”

입구 쪽에서 갑자기 고성이 터져 나왔다. “오 위원장, 뭐 하는 짓이오?” 설명회장이 술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참석한 조합원들이 “끌어내라” “나가”라며 맞받아쳤다. 결국 고함을 지르던 조합원은 8000여 조합원에게 밀려 설명회장에서 쫓겨났다. 그는 울산중공업 내 강경파 소속(130여 명) 조합원 중 한 사람이라고 노조 측은 귀띔했다.

오 위원장은 “여러분, 저 사람들(강경파)은 오늘 설명회를 방해하기로 결의하고 왔답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고 계속하겠습니다”며 설명회를 이어 갔다. 또다시 중간 중간에서 항의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지만 참석자들의 박수 소리에 이내 묻혔다.

오 위원장은 “회사가 위기에서 살아남아야 일자리가 보장되고, 임금협상 위임은 결국 노사 관계의 주도권을 (노조가) 잡는 방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어려울 때 자발적으로 나서면 고용 보장은 물론 위기가 해소된 뒤 정당한 대가를 사측에 요구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시 박수 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오 위원장은 “1992년 현대차 노조 동지들에게 글로벌 자동차산업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외면했다. 그 결과 외환위기 때 수세에 몰려 1만 명 가까이 정리해고의 아픔을 겪었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도요타·삼성마저 흔들리는 글로벌 위기 시대에 아무도 3~4년 뒤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새로운 노사 관계 패러다임이 위기 극복의 해법”이라고 말했다. 노조원들은 박수로 지지를 표시했다.

이날 설명회장에는 다른 회사 노조 간부도 있었다. 현대미포조선·삼성중공업 노조 간부 12명이었다. 이들은 설명회 내내 맨 앞자리에 앉아 오 위원장의 주요 발언 때마다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날 배포된 현대중공업 노조 소식지에는 서울지하철 노조의 정연수, 노루페인트 노조의 김용목, 유한양행 노조의 박광진 위원장 등이 보낸 “새로운 노동 운동을 이끌어 가는 모습에 감탄했다”는 메시지가 실렸다. 40분간 진행된 설명회장엔 여덟 차례나 박수가 터졌다. 임금협상 위임이라는 현대중공업 노조 사상 초유의 일을 저지르는 오 위원장에게 조합원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이렇게 호응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조합원들이 너무나 고맙고, 회사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 몰랐다. 이게 세계 1위 기업의 힘 아니겠느냐”는 그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노조는 25일 대의원대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임금협상 회사 위임안’을 확정해 회사 측에 넘길 예정이다.  

울산=이기원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