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클린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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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러리 클린턴(사진) 미국 국무장관이 첫 해외 나들이인 아시아 순방(15~22일)에서 직설적이고 꾸미지 않은 외교 스타일을 선보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미 외교관들이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꺼리는 미 경제제재 효과에 대한 의문이나 다른 나라의 후계 문제, 중국에 대한 인권외교의 실효성 등을 거침없이 밝혔기 때문이다. 또 클린턴은 외교 업무에 얽매이지 않고 순방국에서 대학생들에게 강연하고, 방송사와 인터뷰하는 등 ‘클린턴표 국무장관’을 선보였다고 워싱턴 포스트 인터넷판이 23일 보도했다. 미 외교가에서는 그의 솔직하고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놓고 찬반 논란이 일 정도다.

클린턴은 18일 인도네시아에서 미얀마 군사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가 의도했던 효과를 냈는지 의문을 표시했다. 경제제재가 독재정권에는 별 타격을 주지 않은 채 미얀마 국민을 괴롭게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19일 인도네시아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미국은 북한이 곧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역대 미 국무장관이 외국의 후계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자제해 온 것과 대조된다.

21일 베이징에서 중국 지도자들과 만나기 전 기자회견에서는 “중국 지도자들에게 인권 문제를 거론하겠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인권 문제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밝힌 것이다. 인권단체들은 그의 발언을 비난했다. “미국이 중국 정부에 압력을 넣지 않을 경우 중국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길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다. 클린턴 장관은 1995년 빌 클린턴 정권에서 중국의 인권 상황을 강하게 비판해 인권단체들이 큰 기대를 걸어왔다.

클린턴은 “(인권단체들의) 비난을 이해할 수 없다”며 “명백한 사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분명한 사고에 방해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무장관이 명백한 사실을 말했다고 굉장히 특이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부 외교 전문가는 “중국 인권 문제에 대한 클린턴의 무시가 미 의회와 인권단체의 비난을 불러와 그의 입지를 좁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이클 그린(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미국 조지타운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리처드 닉슨 이래 역대 미국 대통령은 인권 문제가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했지만, 중국 인권 문제를 무시했다가는 미 의회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대 아시아정책학과장인 데이비드 샘보 교수는 “정직은 실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교에서도 중요한 덕목”이라며 클린턴을 높이 평가했다. 강경파인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미국 외교는 더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며 “중요한 것은 클린턴이 말할 때 목적을 갖고 있었느냐, 아니면 그냥 말뿐이냐 하는 점”이라고 밝혔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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