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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반성문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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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국민 여러분, 제가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크고 무겁고 귀한 짐을 짊어진 지 어느새 일년이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살얼음판을 걷고 지뢰밭을 헤쳐 온 나날이었습니다. 환희의 순간은 짧았고, 면구한 시간은 길었습니다. 손에 닿는 일은 적었고, 힘에 부치는 일은 넘쳤습니다. 국민을 웃음 짓게 한 날은 뜸했고, 그늘지게 한 날은 숱했습니다. 모든 게 저의 밭은 덕과 보잘것없는 지혜 탓이었습니다. 민망하고 또한 송구할 따름입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500만 표차라는 허구의 수치에 눈이 멀었습니다. 저를 찍지 않은 51.3%의 표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를 지지한 48.7% 중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던 유권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자만했고 독선에 빠졌습니다. 그런 저를 바라보는 불안한 표정들을 외면했습니다. 우려는 현실이 됐고, 저를 굳게 믿어준 지지자들마저 실망시켰습니다.

어떤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시작부터 그르쳤습니다. 깍지 낀 눈은 넓지도 밝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만 보였습니다. 그들만이 제 뜻을 헤아릴 거라 믿었습니다. 모르는 얼굴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크고 작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 빚을 갚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이런저런 인연 있는 사람들로만 채웠습니다. 제 허물만큼이나 그들의 과오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옳다고 믿는 게 진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목표를 향해 뛰어가면 모두 따라오리라 여겼습니다. 거치적거리는 건 밀쳐냈고 밟히는 건 차버렸습니다. 지름길로만 내달렸습니다. 다른 길을 가리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을 퍼뜨리고 증오를 부추기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설득해 이끌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우리 사회의 분열은 더욱 틈이 벌어졌고, 반목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정말 면목없습니다. 자신 있다 외쳤던 경제에서도 믿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신뢰가 없었기에 문제가 더욱 꼬였습니다. 미국발 금융위기 탓이라지만 곳곳에서 울리던 경고음을 알아챘어야 했습니다. 사전 대비는커녕 정부 내에서조차 엇박자를 내 시장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뜬금없는 대운하 논쟁을 일으켜 국력을 낭비했습니다. 충분한 설득 없는 감세, 규제 완화는 ‘가진 자들만의 잔치’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케케묵은 숙제인 공기업 개혁은 알맹이가 빠진 채 겉돌고 있습니다. 그 사이 경제위기는 가속을 멈추지 않고 일자리 만들기는 안갯속을 헤맬 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정치를 너무도 몰랐습니다. 과실을 생산하는 게 경제라면 그 과실을 분배하는 게 정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수와 진보, 부자와 서민, 여권과 야권을 모두 아울러 정의롭게 나누기 위해 정치가 필요하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정치란 경제의 발목이나 잡는 소모적 행위로만 치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당은 물론 여당 내 경쟁 계파와의 지속적 소통 구조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늘 남 탓만 했습니다. 그래서 바쁜 걸음, 더욱 발목이 잡혔습니다.

 국민 여러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번만 더 믿어주십시오. 지난 1년간의 시행착오를 밑거름으로 분골쇄신 노력해 보답하겠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지 않겠습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좀 더디 가더라도 약한 사람을 끌어안고 가겠습니다. 다른 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국민 여러분의 신뢰가 꼭 필요합니다. 제게 힘을 보태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년 2월 24일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선거 직후인 2007년 12월 25일에도 반성문을 대신 썼었다. 국민에게 믿음을 주려면 과거 흠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것 없이 출발한 정부가 자평한 1년 성적표는 역시 반성 대신 자찬 일색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는지 딱해서 다시 한번 써 봤다.

이훈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