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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중국의 '홍루몽' 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54년 9월 당시 중공 (中共)에서 일어난 이른바 '홍루몽 사건' 은 중국현대사에서 정치가 문학에 개입한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발단은 소설 '홍루몽' 연구에서 20년대의 호적 (胡適) 과 쌍벽을 이루는 북경대 유평백 (兪平伯) 교수의 '홍루몽' 연구논문들이 부르좌계급의 유심론 (唯心論) 적 관점에서 씌어졌는데도 일부 공산당원들이 매료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시작됐다.

공산당원이던 몇몇 소장 비평가들이 이를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비판한 글을 써 당기관지에 게재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모택동 (毛澤東) 은 당중앙정치국과 관계요로에 친서를 보내 '부르좌적 유심론에 대한 투쟁' 이 자유롭게 전개될 수 있도록 협조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홍루몽' 의 작품성격은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크게 변질됐다.

호적.유평백 등의 연구업적들은 슬금슬금 자취를 감춰버리고 "주인공 가 (賈) 씨 집안이 전체 중국봉건사회의 축소판이며 가씨 집안의 몰락은 바로 전체 봉건사회의 몰락을 반영한다" 는 공산당식 시각이 평가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작품속에 나타나는 남녀평등이나 혼인자유의 요구같은 것들이 바로 신흥시민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었다.

60년대 '문화대혁명' 때 중국의 모든 문화가 역사상 유례없는 대탄압을 받는 가운데서도 '홍루몽' 만은 열람이 허용됐다.

하지만 이 작품이 문학.학술분야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연구대상이었음에도 비판이 허용되지 않은 탓에 이 기간중의 연구논문은 단 한편도 나오지 않았다.

읽을 수는 있게 하면서도 비판은 하지 못하게 한 것이 오히려 이 작품의 대중적 인기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홍루몽' 은 시기적으로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등 이른바 4대 기서 (奇書) 보다 늦게 나왔지만 대중적 인기는 그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읽는 이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과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징임에도 '죽 (竹) 의 장막' 시절엔 정치적 영향력으로 그 몫을 빼앗으려 했으니 득보다는 실 (失) 이 많았을 밖에. '홍루몽' 이 요즘 중국사회에서 붐을 이르키면서 이를 소재로한 담배.과자.차 (茶).술 등 상품 (商品) 까지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는 소식은 중국의 체제가 그만큼 변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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