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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시대]11.만주시절 親日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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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정희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것은 친일및 좌익연루 시비다.

친일성 논쟁의 발단이 된 때가 바로 1940년 2월부터 46년 5월까지의 6년3개월이다.

이 시절 그는 광복군과 관련된 비밀 광복군이었는가, 아니면 독립군 토벌에 참여한 친일파였는가.

이를 검증하기 위해 박정희의 이 시절 경력을 간단히 훑어보자. 40년 봄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 (1942년) 하고 성적 우수자의 특전으로 일본 육사 (57기)에 편입, 본과 2년을 마쳤다.

임관에 앞서 3개월간의 현지 부대 근무를 마치고 44년 7월1일자로 소위에 임관됐다.

임관한지 1년만에 그는 중위로 진급했고 한달뒤 소련군의 참전으로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여기까지 박정희의 경력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소위 임관후부터 귀국때까지의 구체적인 행적이다.

당시 박정희와 같은 부대에 있었던 한국인 동료장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해보자. 부대이끌고 작전안해 만주군내 조선인부대인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다가 44년 8월1일자로 보병8단 (團.연대급) 으로 옮긴 신현준 (申鉉俊.82.해병중장 예편) 상위 (대위) 는 "朴소위는 나보다 한달 전에 부임해 있었다.

8단 근무기간중 朴소위가 부대를 이끌고 일선에 나가 작전을 한 적은 없었다" 고 회고했다.

같은 부대 7중대 선임장교로 있다가 44년 7월께부터 박격포중대 선임장교 (중위) 로 근무했던 방원철 (方圓哲.77.육군대령 예편) 씨는 "朴소위는 단본부에서 갑종부관을 보좌하면서 비교적 편히 지냈다.

그는 지휘관이 아니어서 중국인 사병이나 민간인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어 중국말도 서툴렀다" 고 증언했다.

박정희가 소위로 임관해 첫 부임한 곳은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보병8단. 단장은 탕지룽 (唐際榮) 이란 중국인 상교 (대령) 였고 그 밑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장교들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 장교는 朴소위를 포함해 4명. 그를 제외한 나머지 3명 (신현준.방원철.이주일) 은 현재 생존해 있다.

朴소위의 첫 직책은 단장 부관이었다.

당시 이 부대 부관부에는 갑.을 각 4명의 장교가 근무했다.

부관 책임자는 시모노 (下野) 대위. 을종부관은 인사와 작전을 담당했는데 중국인 중위 두명 (潘.李) 과 朴소위등 모두 세사람이었다.

朴소위는 예하부대에 작전명령을 하달하고 단기 (團旗) 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해방 전야인 45년 8월14일 저녁. 관동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토벌작전을 나갔다가 온 方중위는 목욕을 시작하려다 단본부 朴중위 (45년 7월1일자로 중위 진급) 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내용을 方씨의 증언으로 들어보자. "첫마디에 朴중위는 처음에는 일본말로 '명령을 하달하겠습니다' 라고 했다가 '지금부터는 기밀상 조선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며 다시 조선말로 얘기했다.

전달내용은 8월9일 소련군 참전으로 우리부대 (8단) 는 흥륭 (興隆) 을 거쳐 둬룬 (多倫) 방향으로 이동할 계획이니 내일 (15일) 새벽 3시30분까지 병력을 이끌고 단본부가 있는 반비산 (半璧山) 으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 박정희는 임관때부터 해방때까지 이 부대 부관으로 있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박정희가 정보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 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한편 60년대에 나온 박정희의 광복군 관련설은 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84년 장창국 (張昌國.전 합참의장.작고) 씨는 '육사졸업생' 이란 책에서 "신태양악극단 (新太陽樂劇團) 이 철석 (鐵石) 부대로 위문갔을 때 이 악극단의 잡역부로 위장한 비밀광복군 이용기 (李龍基)가 박정희와 접촉, 광복군 비밀요원으로 만들었다" 고 주장했다.

또 86년 한 월간지는 한술 더떠 박정희가 신현준 상위, 이주일 (李周一.79.전 감사원장) 중위등 뜻맞는 장교들과 비밀 광복군 조직에 착수했으며 45년 5월부터는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훈련시킨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申씨는 "그런 사실이 없으며 우리는 당시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 고 부인했다.

정보장교 주장 사실무근 또 위 두곳에서는 당시 박정희의 소속부대가 보병8단이 아닌 '철석부대' 로 돼 있다.

철석부대란 39년 3월 간도 (間島) 명월구 (明月溝)에서 창설된 간도특설대가 러허 (熱河) 성에 파견돼 있을 때의 별칭이다.

부대장 이하 일부 장교는 일본인이지만 대부분의 장교와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에 근무했던 송석하 (宋錫夏.82.육군소장 예편).박창암 (朴蒼岩.74. '자유' 발행인) 씨등은 한결같이 "박정희는 이 부대에 근무한 적이 없다" 고 잘라 말했다.

박정희가 철석부대에 근무했다는 기본 전제부터 허위인 셈이다.

당시 철석부대에 위문간 것으로 돼 있는 신태양악극단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 악극단의 단장이었던 원로작곡가 손목인 (孫牧仁.84) 씨는 "더러 군대위문도 갔지만 철석부대의 이름은 기억에 없고 (단원중 잡역부로 가장해 박정희를 만났다는) 이용기라는 인물은 모르겠다" 고 말했다.

단원이었던 원로가수 申카나리아 (79) 씨와 원로배우 황해 (黃海.77) 씨도 "이용기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다" 고 밝혔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비밀 광복군 이용기' 는 실존조차 의문스럽다.

이밖에도 박정희가 해방전 광복군과 은밀히 관련됐다는 주장을 뒤엎을만한 증언과 근거는 많다.

그가 해방을 안 시점, 광복군 편입및 귀국과정을 보면 그렇다.

8월9일 소련군의 참전으로 그가 속했던 8단은 14일 저녁부터 5군관구 사령부가 있던 청더 (承德) 를 향해 이동중이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 동기생인 중국인 가오칭인 (高慶印.75.재미) 은 "우리 일행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8월16일이었다.

그날 오후 박정희를 만났는데 그는 '이제 일본이 망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며 앞일을 걱정했다" 고 전한다.

이후 조선인 장교들은 중국인 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당한후 베이징 (北京) 으로 가는 길목의 미윈 (密雲)에서 1개월 정도 머무르다 추석이 지난후 마차로 베이징에 갔다 (高씨 증언) . 해방후 베이징에 가 뒤늦게 광복군에 편입된 조선인 출신 만주군 장교는 朴중위를 포함해 신현준 상위, 이주일 중위등 3명. 이들은 해방후 재편성된 광복군 3지대 평진 (平津 ; 北平과 天津) 대대에 편입됐다.

만군 계급순으로 신현준 상위가 제1대대장을 맡고 이주일 중위와 박정희 중위가 각각 1, 2중대장을 맡았다.

당시 상황을 신현준씨는 "베이징에 갈 때까지도 우리는 광복군의 존재를 몰랐다.

8단에 있으면서 광복군과 비밀리에 관련을 맺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우리는 베이징에 가서도 광복군에 들어갈 것인지 의논한후 '해방도 되고 했으니 일단 들어가보자' 고 해 들어갔다" 고 증언했다.

따라서 박정희가 광복군의 존재를 안 것도, 광복군에 편입된 것도 모두 해방후의 일이라는 얘기다.

광복군 존재 해방후 알아 이듬해 5월6일 박정희는 일행과 함께 톈진 (天津)에서 LST선을 타고 출발, 5월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 배에는 귀국하는 조선인들로 가득찼고 그 속에는 신용호 (愼鏞虎.80.교보생명 명예회장) 씨도 끼어있었다.

愼회장은 "朴대통령과 한 배에 타고 온 것은 사실이나 자세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고 전했다.

신현준씨도 "당시 분명히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고 강조했다.

그의 귀국 과정에 대해 박정희의 일본육사 동기인 '조선군사령부' 의 저자 후루노 나오야 (古野直也.73) 는 본사에 편지를 보내와 "박정희가 만주에서 썩기는 아깝다고 생각, 일본 관동군 참모 선배들의 주선으로 육군 전투기를 동원해 서울로 귀환시켰다" 고 주장했다.

일본육사 동창회 소식지 '가이코 (偕行)' (95년 8월호)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측의 이런 움직임은 일본 우익들의 '신대동아공영권' 구상과 일맥 상통한다.

朴전대통령과 대만의 장제스 (蔣介石) 전총통이 일본육사 출신이란 점에 착안, "아시아의 지도자 상당수는 일본식 장교양성 교육을 받았다" 거나 "종전의 혼란기 속에서도 일본은 미래를 내다보고 인물을 키우고 보호했다" 는 등의 논리를 내세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들조차 후송하지 못해 포로가 되는 것을 방치했던 패전의 와중에 식민지 출신 만군 중위를 특별대우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제 박정희의 만주 경력을 둘러싼 근거없는 미화나 의도적인 격하 (格下) 는 막을 내려야 한다.

그는 해방전 광복군과 관계를 맺은 적도 없지만 만군시절 독립군 토벌에 나설 기회조차 없었다.

그의 만주시절은 어릴 때부터의 꿈인 군인을 이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특별취재팀

▶실록 '朴正熙시대' 는 중앙일보 인터넷신문 (http://www.joon gang.co.kr)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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