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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으로 풀어낸 두 가지 ‘위험한 사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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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03면

한곳을 바라보며 같은 꿈을 꾸는 부부들 중 영화계에서 일과 생활을 동고동락하는 이가 꽤 많다. 하지만 영화감독이라는 좁디좁은 문을 둘 다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월 초 개봉한 영화 ‘키친’의 홍지영(38) 감독에게는 의미 있는 꼬리표가 하나 붙어 있다. 홍 감독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 등을 연출한 민규동(39) 감독의 부인이다. 남편과 아내가 각각 장편 영화를 내놓은 것은 우리 영화사상 처음이다.

부부 유★- 사상 최초로 따로따로 장편영화 낸 민규동,홍지영 감독

그런데 이들이 만든 영화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 아내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남편은 벌써 세 번째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홍보로 한창 바쁜 홍지영 감독, 그리고 베를린영화제에서 막 돌아온 민규동 감독을 어렵게 섭외해 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위험한’ 영화들을 찍었느냐고.

“동성애 고백 장면으로 시작하는 ‘앤티크’도 그렇지만, ‘키친’도 미칠 것 같은 긴장감으로 드라마가 시작해요. 처음부터 아내와 낯선 남자의 정사 장면이 들어가요, 그리고 남편의 한식 레스토랑 오픈을 돕기 위해 셋이 동거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죠.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너무 약해요. 이렇게 정사 장면이 안 나와도 되는 거야, 하고 충고를 했었죠. 내가 만들었으면 아주 진한 영화가 됐을 텐데.”(민)

“민 감독이 제작자인데… 집 담보대출(웃음),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제작자로서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역할도 맡아 주었죠. 하지만 저는 애정 장면은 아쉬운 정도로 넘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발그레한 살갗을 만지는 손길, 흐트러진 숨결, 얽히는 시선, 이런 것들이 더 에로틱하잖아요. ‘앤티크’에서도 두 남자의 정사 장면 자체를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끝난 후에 둘이 비스듬히 안고 만지는 모습만 나오는 게, 너무 뜨겁게 느껴졌어요.”(홍)

상당히 과격하고 모험적인 소재인데도, ‘키친’ ‘앤티크’ 둘 다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무슨 불륜영화나 인권영화처럼 소재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순정만화처럼 밝고 귀여운 스토리와 화면인지라, 대중적으로도 거부 반응이 아니라 꽤 큰 호응을 얻었다. 중혼을 요구하는 여자도 예쁘면 용서가 되고 동성애자도 꽃남이면 용서가 되는 분위기랄까.

“낯설고 불편한 얘기일 수 있지만 세심하게 배려한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었어요. 다채로운 화법을 통한 우회 전략이라고 보셔도 되고요.”(홍)
“제가 하고 싶고 준비한 이야기는 다양하게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퀴어 코드가 들어간 영화만 투자를 받게 된 상황이 흥미롭지 않나요?”(민)

“원래 ‘앤티크’는 제가 하고 싶어서 판권을 알아봤던 작품이에요. ‘여고괴담2’의 민규동 감독이 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리는 바람에 각색자로 물러나야 했죠.”(홍)
이런저런 속사정을 듣다 보니,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영화에 마치 인장처럼 찍힌 공통의 문화 코드들이 이해됐다.

모던 한식과 케이크를 비롯한 음식, 한옥과 같은 빈티지 공간과 소품, 프랑스에서 온 손님 등 최근 문화적 트렌드를 앞서가는 감수성과 취향들이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개스트로섹슈얼(gastrosexual), 즉 뛰어난 요리 솜씨와 성적 매력을 연결시킨 설정이다.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시각적인 면도 있고, 요리라는 게 굉장히 관능적이잖아요. 마음(연애)을 표현하는 좋은 장치이자 도구이기도 하고요.”(홍)
“저는 아내에 비해 미식가도 아니고 하지만 잘 맞지 않는 것들을 향해서도 언제나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절제된 쾌락주의자랄까….”(민)

두 영화의 또 하나 공통점은 주인공을 맡은 배우 주지훈이다. ‘앤티크’에서는 케이크 가게를 열어 김재욱·유아인·최지호 등 훤칠한 꽃미남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사장이었고 ‘키친’에서는 자유분방한 천재 요리사가 되어 신민아·김태우 부부 사이에 끼어들었다.

게다가 둘 다에서 주지훈은 인상적인 프랑스어 연기를 선보인다. ‘앤티크’에서는 고압적 프랑스인 파티시에와 대적하는 장면, 그리고 ’키친’에서는 트로트 곡 ‘사랑밖에 난 몰라’를 프랑스어 버전으로 부르는 장면이다. 2000년 무렵 결혼해 파리로 유학 간 두 감독의 경험이 만들어 낸 설정이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와 낯선 풍경과 사람들을 접하면서 우연과 오기에 몸을 맡겼더랬죠… 프랑스에는 아내가 훨씬 잘 어울리는 사람이죠. 심지어 유부녀라는 걸 숨기고 수많은 남자친구와 소풍을 다니고(일동 폭소)….”(민)

“저도 이방인으로 불편하게 느꼈던 것은 같지만, 내 안의 다양한 욕구를 거기서 발견했고, 그것이 끊임없다는 걸 알았고, 내가 몰랐던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많은 분이 (영화 속에서처럼) 이런 사랑이 있을 수 있어? 하는 의문을 표하지만…다양한 생각이 존재하고 표현됐으면 좋겠고 그것을 관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쉬워요.”(홍)

어쨌든 적어도, 파트너십을 공유하는 데다 관용의 정신을 아는 남편이 아내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 살짜리 딸이 하나 있는 이 부부의 가족 생활은, 가족관은 어떨지 궁금했다. ‘앤티크’가 보여 주고 있는 남성끼리의 애정과 우정 사이 연대감도 묘하고, ’키친’은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 동거로, 더 나아가 가족의 형태로까지 발전되는 낌새다.

“남자들끼리 안거나 키스하는 ‘앤티크’의 장면이 꼭 동성애적인 의미만은 아니고요. 스킨십을 통해 동지애가 느껴지는 순간들을 표현하고 그런 따뜻함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어요.”(민)
“기본적으로 ‘키친’의 세 남녀 모두 서로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에요. 질투심과 상실감 때문에 폭력이 일어나기도 하고 헤어짐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결말은 열려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이 계속 함께 살 수 있을까 하는 여운을 남기고 싶었죠.”(홍)

이후 민규동 감독은 남자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던 가족이 조금씩 크게 변해 가는 것 같다는, 급진적이고 철학적인 상념을 내놓았고 홍지영 감독은 좀 더 캐주얼하고 감성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대화를 들으면서, 1994년 영화학도로 처음 만나 함께 혹은 헤어져 단편 작업을 할 때부터 파격적인 소재와 이슈를 다뤘던 그들의 필모그래피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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