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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대담한 ‘오스카 여신’들의 원조, 마담 X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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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06면

1 ‘마담 X’(1883~84), 캔버스에 유채, 208.6x109.9㎝,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2 ‘마담 X’ 수정 전 사진 자료 3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니콜 키드먼

우리 시간으로 내일(23일) 오전 시작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누가 수상할 것이냐 못지않게 여배우들이 어떤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 위에 설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시상식 후에는 잡지며 패션 웹사이트마다 베스트·워스트 드레서를 선정할 것이고, 워스트 드레서에게는 “집에 있는 커튼 잘라서 입었나요?” 같은 독설을, 베스트 드레서에게는 “황홀한 현대판 여신” 같은 찬사를 던지리라.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비평가가 최고라고 선정한 옷차림이 다른 비평가에 의해 최악으로 선정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호평받는 배우가 몇 있으니, 그중 하나가 니콜 키드먼이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키드먼이 임신한 몸으로 허리선이 높이 올라가는 발렌시아가의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 그 위로 길게 늘어진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부조화를 보였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여전히 ‘마담 X’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모습이라는 평이 많았다. 2003년 그녀가 장 폴 고티에의 검은 드레스를 입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도(사진 3), 한쪽에만 달린 세 줄의 어깨끈이 “마치 서서히 흘러내리는 ‘마담 X’의 어깨끈처럼 관능적이면서도 우아하다”는 평이 줄을 이었다. 대체 마담 X가 누구이기에?

‘마담 X’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관람객의 눈길을 강력하게 잡아 끄는 초상화의 제목(사진 1)이다. 작가는 19세기 말 초상화의 대가였던 미국인 존 싱어 사전트(1856~1925). 이 초상화는 일단 그림의 높이가 2m가 넘는 데다 인물의 검은 드레스와 창백한 빛을 내는 살결의 극적인 대조, 도도한 자세와 가슴 깊이 파인 관능적 의상의 도발적 조화 때문에 주변에 걸린 사전트의 다른 초상화들을 압도해버릴 정도다.

그렇다면 마치 미녀 스파이의 암호명 같은 ‘마담 X’라는 익명으로 불리는 그림 속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그녀는 당시 파리 사교계의 인기인이었던 고트로 부인인데, 원래 미국 출신으로서 프랑스로 이주해 온 뒤 부유한 은행가 고트로와 결혼했다. 그녀는 미모뿐 아니라 유행을 앞서나가는 파격적인 패션과 대담한 언동으로 화제를 모았다. 역시 파리에서 조금씩 명성을 쌓아 가고 있던 젊은 화가 사전트는 그런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간청했던 것이다.

이 ‘마담 X’ 초상화를 보면 고트로 부인이 전형적 미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코도 좀 큰 편이고 피부는 화사하게 하얀 것이 아니라 창백하게 하얗다. 하지만 그녀는 화사해 보이려고 애쓰는 대신 옅은 보라색 파우더를 사용해 창백함을 강조했다고 한다. 보석끈이 달리고 검은 벨벳과 공단으로 만들어진, 심플하면서도 값져 보이는 그녀의 드레스는 당장 내일 아카데미 시상식에 입고 나가도 좋을 만큼 현대적이다. 고트로 부인의, 이런 시대를 앞서가는 멋스러움이 사전트를 매혹했을 것이고 그는 이 초상화에서 그 멋스러움의 핵심을 절묘하게 표현해 낸 것이다.

그런데 “마담 X의 흘러내리는 어깨끈 같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그림을 보면 어깨끈은 다 제자리에 잘 있는데 말이다.
사실 이 초상화가 처음 파리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는 한쪽 어깨끈이 흘러내려 간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사진 2). 그런데 그것이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굉장한 물의를 일으켰다. 사전트와 고트로 부인 모두 요새 말로 하자면 ‘튀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이 그림이 어느 정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기대도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그리고 나쁜 쪽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비너스 여신의 누드화는 잘도 보던 사람들이 어깨끈 하나 가지고 왜 그랬을까 싶은데, 상류층 부인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사실적인 배경 속에서 살짝 흘러내려간 어깨끈이 신화적인 배경 속의 노골적인 나체화보다 더 은근히 에로틱하게 느껴질 수도 있긴 하겠다. 그리고 어깨끈뿐 아니라 유난히 창백한 피부와 독특한 자세가 주는 도발적인 느낌도 구설에 올랐던 것이다.

마침내 사전트는 그림을 회수해 어깨끈을 지금처럼 고쳐 그렸지만,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사전트는 파리에서 출세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떠났고, 고트로 부인은 한동안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꼬이면 자신의 작품이라도 정이 떨어질 법도 하련만, 사전트는 나중에 영국과 미국에서 초상화가로 크게 성공한 뒤에도 ‘마담 X’가 자신의 최고 작품이라고 말하면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말은 맞았다. ‘마담 X’는 비록 그 대담함으로 당대에는 물의를 일으켰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대담함이 결코 우아함을 손상시키지 않았고, 요란하거나 천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아함과 파격과 관능미를 조화시키려고 애쓰는 패션 디자이너들과 스타일리스트들에게 끝없는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크리스찬 디올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그의 ‘2008년 봄여름 파리 컬렉션’이 ‘마담 X’에게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전트는 초상화를 그릴 때 모델의 매력을 정확히 포착해 벨라스케스 같은 거장들을 닮은 활달한 필치로 그 매력을 간략하면서도 핵심을 살려 표현해 냈다. 그래서 한때 20세기 초에는 그저 부유층의 허영심을 채워 주던 번지르르한 초상화가로 폄훼되었던 사전트가 20세기 후반부터는 시대를 초월한 매력적인 초상화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중앙데일리 경제산업팀 기자. 일상 속에서 명화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며,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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