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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민요기행]2.훈춘市 미장鄕 퉁수마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외국에서 60~70년 살았으면 완전히 동화됐을 법도 하지만 삶의 모습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못되는 모양이다.

조선족이 사는 농촌의 집들은 대개 비슷해서 대문 안으로 마당이 있고 마당가에는 과꽃과 맨드라미가 심어져 있고 마당 옆으로 외양간이 있어 누런 황소가 여물을 먹고 집 뒤 채밭에는 상추며 고추를 심어 먹는다.

된장국과 김치와 고추장은 반드시 상에 오르고 날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습관도 국내에서나 같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자식의 교육 문제여서 선양 (審陽)에서 5시간 거리의 신빈현 (新濱縣) 왕칭먼 (旺淸門) 조선족 자치향에서 만난 살아있는 유일한 독립군 이태윤 (81) 노인이나 흑룡강성의 경승지 경박호의 폭포촌에서 만난, 한국전쟁에 의용군으로 금화까지 내려온 일이 있다는 김복룡 (69) 노인도 같은 고민에 싸여 있었다.

한족들은 대개 의무교육인 중학교로 만족하는데 조선족은 고중 (高中 = 고등학교) 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까지도 기를 쓰고 가르친다.

농사지어 먹고 사는 일이야 걱정없지만 이러자니 빚을 지게 된다.

이렇게 가르쳐 놓으면 아이들은 도시로 나가 들어올 생각을 않는다.

더구나 자녀들은 중학 나오면 진학여부에 관계없이 돈벌이가 좋은 도시로 빠져나가 그나마 몇 남아 있는 농촌총각은 장가갈 길이 없다.

신입생이 없어 폐교 위험에 놓여 있는 소학교도 많다.

옌볜 (延邊) 조선족자치주 훈춘 (琿春) 시의 미장 (密江) 향도 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

두만강과 미장향이 만나는 곳에 있는 곳으로 인구 2천8백중 90%가 조선족. 이곳도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 노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퉁소를 부는 사람들이 많은 특이한 마을. 퉁소를 부는 사람이 2백여명이니 중국인과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열명에 하나 꼴은 퉁소를 분다는 소리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모두들 도시로 나가 퉁소를 이을 사람들이 없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언젠가는 퉁소 마을의 명성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들을 하고 있다.

미장향에 어떻게 해서 전통 퉁소가 남아 있는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소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동양촌이 있는데 그 동양촌에 예부터 퉁소가 전해져오고 있는 것을 몇해전 훈춘 문화관에서 2백대의 퉁소를 사서 제공한 것이 본격적인 퉁소 마을이 되는 계기가 됐다.

동양촌은 미장향에서도 가장 오래된 조선족 마을로 강건너 북한 함경도에서 10세기 말에 건너온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문화관에 모여 '아즈랑가' 등 몇 곡을 시범으로 들려준 다음 강건너로 북한땅이 잡힐 듯 보이는 강가로 나갔다.

갑자기 모은 25명의 퉁소꾼 가운데는 아낙네 일곱과 소년이 하나 끼어 이채로웠는데 이들은 북과 아코디온 반주에 맞추어 '아즈랑가' '라질가' '시나위' 를 차례로 신나게 불어제꼈다.

연주 끝에 김관순 (64) 노인은 옛날 의용군이 농사지으며 부르던 민요라는 '호메가' 를 부르고 올해 중학을 마치고 옌볜 예술학원에 입학하는 최민 (16) 군은 '감주타령' 을 불렀다.

내가 최군의 퉁소와 노래를 칭찬하자 퉁소꾼으로 함께 끼었던 그의 어머니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아이만은 끝까지 가르치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신경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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