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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재일교포 2,3세가 보는 8·15 …시가사와 메구무 ·최양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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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국에서는 광복.해방, 일본에서는 패전.종전으로 불리는 8.15지만 60만명을 헤아리는 재일교포에게 이 날은 또다른 의미를 갖는다.

재일교포 2세로 '달은 어디에 떠있나' 로 유명한 영화감독 최양일 (崔洋一.48) 씨와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 이즈미 교카 (泉鏡花) 상 수상자이기도 한 소설가 사기사와 메구무 (鷺澤.29.교포3세) 씨와의 대담을 통해 8.15와 한.일 관계의 과거.현재.미래를 이들 나름의 시각으로 조명해본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보통의 한국인.일본인은 물론 한맺힌 생으로 점철된 교포 1세와도 다른 8.15관 (觀) 을 지니고 있었다.

최양일 = 솔직히 말해 나는 49년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아직도 8.15라면 '전후 (戰後)' 라는 용어가 더 익숙하게 연상됩니다.소년.청년기를 거치면서 해방.항복등의 의미도 인식하게 됐지만 말입니다. 물론 나의 부모세대는 나와 달리 글자 그대로의 '해방' 을 경험한 분들이지요. 8.15를 실체랄까, 실감의 대상으로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재일교포는 나 말고도 많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사기사와씨는 어떤가요.

사기사와 = 저는 더해요. 68년생인데다 우리 집안의 내력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도 스무살이 돼서야 알았으니까요. '해방' '광복' 에 대해서는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깨닫게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닌걸요. 그런데 최감독님은 8월15일을 한국에서 보낸 적이 있나요.

최 = 지난해 8.15때 서울에 있었죠.

사기사와 = 나도 서울에서 8.15를 맞은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큰 소동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최 = 그렇더군요. 전국적으로 기념사업같은 것이 대대적으로 벌어질줄 알았는데. 역시 세월이 흐른 탓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8.15가 가까워지자 매스컴에서 가해.피해사실과 관련된 특집을 많이 마련해 보도.방영하더군요. 일본에 대한 거리감이랄까, '항일의식' 같은 것이 평소보다 고조되는 분위기는 확실히 있었지요.

사기사와 =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인 가운데도 원폭 피폭자를 비롯한 전쟁피해자가 많지 않습니까. 이때문에 '전쟁으로 해를 당한 것은 우리' 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매우 많다고 봐요. 피해자라는 인식에서 가해자로서의 측면을 잊어버리는 경향도 확실히 있어요.

최 = 그렇습니다. 보통 일본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나도 당했으니까 당연히 피해자가 아닌가 하고 인식하지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본이 (전쟁을) 저질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사기사와 = 어제 한 TV의 특집프로가 나가사키 (長崎) 시 원폭자료관 문제를 다루었어요. 자료관에는 일본의 가해사실을 다룬 코너도 있었는데 우익단체등에서 맹렬히 반발하더군요. "이런 것을 전시하면 어린이들이 '역시 해를 가했으니까 원폭으로 당했구나' 하는 인식을 갖게 된다" 는 반발이었지요.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상해요. '가해에 이어 피해가 뒤따르는 것이 전쟁인 만큼 전쟁을 저지르지 말자' 고 가르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최 = 나는 한국인 친구들로부터 '원폭은 잘 떨어졌다. 덕분에 해방이 앞당겨졌다' 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원폭희생자 중에는 한국인도 5만명이나 포함돼 있어요. 지금도 재한 (在韓) 원폭피해자들의 피해인정.치료.보상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채 남아 있고 일본 정부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인 것으로 압니다.

나는 대량 살인무기의 존재 자체와 이를 전쟁에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정당성 시비는 따로 가려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기사와 = 역시 감독님도 일본 태생이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문화적.교육적으로 '피폭국가 일본' 을 강조하는 환경에서 자란 탓이겠지요. 나도 '원폭투하는 잘된 일' 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이 들거든요. 그렇더라도 명백히 증인까지 있는 난징 (南京) 학살같은 문제에 대해 우익단체들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최 = 아무 것도 모르는 청소년층은 그들의 말만 듣고 '거봐라. 역시 우린 피해자야' 라고 할 것 아닙니까. 식민지통치 문제도 그렇지요. 일부만을 드러내 '좋은 일도 했다' 고 주장하면 당시를 체감하지 못한 세대는 '전쟁에는 졌지만 그때까지 했던 일 중에는 좋은 점도 많았구나' 라고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쪽이 훨씬 마음도 편하겠지요.

사기사와 =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것은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한국은 베트남전에 군대를 보낸 일을 제외하고는 전쟁을 일으켰다든가, 전쟁에 가담한 적이 없지요. 이는 자랑할만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최 = 원래 가해자는 쉽게 잊지만 당한 쪽은 그러기 어려운 법 아닙니까. 저지른 쪽이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여하튼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 차이는 정말 커요. 한국에 있을 때 일본에서 놀러온 일본인 친구와 함께 모범택시를 탔는데 운전사가 대뜸 독도 영유권문제를 들고나와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사기사와 = 시끄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한국인의 애국심은 바람직하고 부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반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일본은 이런 면을 이미 잃어버렸지만요. 나도 한국에서 '2002년 월드컵축구 공동개최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곤혹스럽지만 '대다수 일본인은 공동개최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않고 관심도 없다' 고 사실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요.

최 = 한국도 젊은 세대는 강렬한 내셔널리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여요. 월드컵 공동개최에 대해 내쪽에서 물어보면 '조금 기분이 상하지만 냉정히 보면 잘된 일' 이라는 대답이 많더군요. 왜 기분이 상했느냐고 되물으면 '별 뜻은 없다. 왠지 그렇다' 고 해요. 이 부분은 역시 나에게는 결여된 감정이었습니다.

사기사와 = 그렇지만 걱정이에요. 앞으로도 이런저런 일로 옥신각신할 것같아요.

최 = 한.일간에 티격태격하는 것은 거의 예정된 코스 아닌가요 (서로 웃음) .그러나 내 주변의 일본인 친구중에는 월드컵을 한국에서 단독개최하는게 더 낫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사기사와 = 내 친구들도 그래요. 그렇게도 원한다면 한국에 주자고.

최 = 친구들은 한국을 노인부터 어린이까지 온통 축구에 열중하는 축구왕국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인기순으로 봐도 축구는 야구.농구 다음일거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렇다' 고 설명해주긴 했지만요. 요컨대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잘 모르고 있어요.

최 = 화제가 좀 바뀝니다만 재일교포의 국적문제, 정체성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최근 민단 (재일본 대한민국민단) 청년회 간부와 대화하면서도 느낀 점인데 재일교포 중에서도 1세와 3, 4세간의 의식차는 매우 크더군요. 일본으로의 국적변경, 즉 귀화문제에 대해서도 유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민단이 지금 벌이고 있는 지방참정권 획득운동도 결국은 앞으로 일본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정주자 (定住者) 로서 권리를 찾자는 운동 아니겠습니까. 현재 재일교포의 80%가 3, 4, 5세들인데 나는 이들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가정내에서의 대화를 통해 형성되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우리의 부모.조부모 세대가 일본에 오게 된 경위같은 것에 대해 대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일 겁니다.

사기사와 = 다들 아픈 사연이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후손들에게 낱낱이 이야기해주는게 낫다고 생각해요. 내 친구중에 교포2세가 있는데 최근에서야 자기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대요. 저만 해도 한국어를 배운뒤 할머니와 한국어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언니가 말려요. '60년간 숨겨온 것을 네가 왜 깨려 하느냐고요. 우리 할머니는 열네살때 평안도에서 일본에 오셨다고 해요. 집안이 매우 가난했던 모양인데 일본 가정에 양녀로 보내준다는 꾀임에 속아 오게 됐다지요.

최 = 어떤 의미에서는 교포1세가 2세 이하보다 더 일본 사회에 녹아들려고 노력한 면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 아버지도 일본에 오게된 사연을 이야기해주지 않은채 돌아가셨어요. 일부 교포들이 족보를 구해 '원래 좋은 집안이었다' 고 자랑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 아닐까요. 양반이라면 왜 일본에 돈벌러 왔을까 의문이 들지만요 (웃음) .

사기사와 = 한국인은 예외없이 전부 자기가 양반집안이라고 하더군요 (웃음) .그래도 재일교포들은 한국인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유학때 재미교포를 만난 적이 있는데 완전히 그 나라 사람이 됐더군요. 그렇지만 재일교포는 한국에 가도 차이고, 일본에 가도 차이고….

최 = 나는 동시에 '그런 어느쪽도 아니다' 는 점에 재일교포의 자기 귀속성 (歸屬性) 이 있다고 생각해요. 교포사회에도 이제 '이곳 (일본)에서 살아가는 이상 우리 길은 우리가 찾는다' 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교포가 (본국에 의해) 어느 때는 인질, 어느 때는 돈내는 기계, 어느 때는 정치도구로 이용되던 시대는 지났어요.

사기사와 = 본국에서도 이런 흐름을 바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작품은 내용이 관건이듯 인간도 국적보다 '내용' 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 = 지난번 괌 대한항공기 추락사고때는 한국인 어머니가 일본 국적의 딸을 살리고 숨졌지요. 비극이었지만 나는 그 어머니가 진짜 한국인이라는 느낌에 감격했어요.

사기사와 = 역사인식이란 것도 현실생활 속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한 친구는 한국을 싫어했지만 한국음식에 반한 것을 계기로 지금은 한국팬이 됐어요. 한.일간의 '풀뿌리 교류' 가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형태라고 봅니다.

정리 = 노재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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