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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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오피스텔로 들어서자마자 하영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동안 나는 담배를 피우며 위스키를 한잔 더 마셨다.

일종의 마비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웬지 오늘은 그것마저도 제대로 되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섹스가 민감하게 진행되는 거라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나는 심리적으로 마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섹스를 하는 동안의 사념만큼 사람을 서늘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냉각제가 어디 다시 있으리. 그래, 마음의 불구를 잊기 위해 취하는 게로구나 하영이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나는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정하기 어려운 증거처럼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섹스를 한 적이 별로 없다는 기억까지 되살아 났다.

맨정신으로 사랑의 행위를 나눌 수 없는 상대를 진정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잇는 건가?

샤워기에서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나의 입에서는 무엇을 향해서인지도 모르게 연해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는 말이 터져나왔다.

빌어먹을!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하영은 불을 끈 어둠 속, 벽쪽에 붙여 놓은 소파에 알몸으로 앉아 있었다.

커튼을 걷어놓은 발코니 쪽에서 밀려든 검푸른 빛에 젖은 그녀의 육체를 향해 나는 말없이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소파 앞에 서서 어둠의 일부가 되어 있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 성적인 긴장감으로 그녀의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돼 있다는 걸 어둠 속에서도 나는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 자신을 스스로 자극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수동적이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이라는 걸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물을 퍼올리듯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와 뺨에 입맞추고 이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촉촉하게,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그녀의 입술에서는 싱그러운 오이 향내 같은 게 맡아졌다.

한쪽 무릎을 꿇어 소파 앞에 앉으며 나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왼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반듯하게,가늘고 긴 그녀의 몸을 소파에 눕혔다.

하지만 진찰대로 올라가 누운 환자처럼 그녀의 몸은 아직 팽팽한 긴장감으로 경직된 상태였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마지막 시술을 감행하는 의사처럼 그녀의 몸에 대해 본능적으로 강렬한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파에 반듯하게 누운 그녀의 알몸, 내 손길 닿은 곳마다 서서히 체온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얼굴과 목선을 따라 부드러운 젖가슴에 이르고, 거기서 나는 모성을 그리워하는 아이처럼 한동안 머뭇거리며 자그마한 유두와 젖꽃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흐흠, 하는 신음을 가까스로 속으로 삼키며 그녀는 허리를 꿈틀거렸고, 곧이어 나의 머리를 힘주어 감싸안았다.

깊고 푸른 오월의 봄밤, 어디선가 짙은 훈향이 날아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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