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오지에 한국을 심는다]3. 이집트 태권도 대부 정기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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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차렷! 사범님께 경례!" 지난달 15일 오후6시30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내 외곽에 위치한 게지라 스포츠클럽내 태권도 승단 심사장.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가 마지막 기세를 부리는 시간이다.

클럽내에서 운동을 즐기다 30여분 전부터 하나 둘씩 승단 심사장을 찾아든 1백여명의 시선이 일제히 5명의 심사위원석 중앙에 앉은 정기영 (丁璂濚.52) 사범에게 몰렸다.

"준비. " 丁사범의 말이 떨어지자 검은색 'POLICE' 마크가 선명히 찍힌 흰 도복을 입은 이집트 경찰대생의 손끝 마디 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정기영씨는 이집트 태권도의 대부로 불린다.

그의 태권도 경력은 국가대표팀 감독.태권도 8단.국제심판으로 압축된다.

체육부 근무 당시이던 지난 84년 딱 2년만 근무하겠다는 생각으로 태권도 사범으로 이집트에 건너왔는데 이집트가 좋다.

91년 국제협력단 (KOICA) 창설과 함께 현지파견원으로 소속을 바꿔 지내온게 벌써 14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95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우리와 달리 북한은 우리보다 30년 이상 앞선 63년 이집트와 외교관계를 가졌으며 일본은 월등히 앞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도 보급에 온 힘을 쏟았고 태권도는 '어느 동네의 운동' 인지 모르는 이집트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태권도는 이집트 경찰대학 4천5백명 학생의 필수과목이 됐으며 전국에 흩어진 1천여 태권도 도장을 통해 15만명의 이집트인이 직접 태권도를 접했다.

특히 이곳 사람들에게 태권도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경찰대학의 태권도 필수과목 지정에는 丁사범과 함께 현재 국제협력단소속 임한수 (林漢洙.41.6단) 사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95년 태권도의 명성을 접한 당시 경찰대학장이 이들에게 "태권도를 학생들에게 가르쳐보면 어떻겠느냐" 고 제의해왔다.

두사람은 이에 대해 "유도와 가라테는 경찰대에서 완전히 제외하고 태권도를 필수과목으로 정해주는 조건을 받아들이면 한번 멋지게 해보겠다" 고 응답, 의견을 관철시켰다.

지난달 20일엔 경찰대를 찾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앞에서 林사범이 이끄는 경찰대생들이 태권도 시범을 보여 격찬을 받았다.

丁사범이 태권도 지도에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언어 문제였다.

'앞차기' '지르기' 등 한국어로 된 태권도 경기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집트인들에게 동작과 함께 '한국어 경기용어' 를 가르치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했다.

또하나 '인샬라 (모든 것이 神의 뜻)' '인샬라' 를 외치며 '잘되고 못되는 모든 것이 신의 뜻' 이니 굳이 뭐 잘 하려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태도로 잘못된 것을 선뜻 고치려 노력하지 않는 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丁사범이 이끄는 16명의 이집트 태권도 국가대표팀은 지난 1월 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카이로에서 열린 제1회 피라미드 국제대회에서 한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하는등 매년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는 올림픽 금메달 획득 가능성이 가장 높은 종목이다.

특히 97월드컵세계대회에서 대표팀 무스타파 엘하미 이브라힘 (18.여)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는등 올림픽 금메달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으며 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유도 은메달을 마지막으로 노메달에 그치고 있는 이집트 정부도 '올림픽 금메달' 후보인 태권도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에인샴대 치대 1년생인 엘하미 선수는 "丁사범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든간에 우리는 사범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 며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것이 최고의 꿈" 이라고 메달에 대한 강한 집념을 나타냈다.

지난 4월 한국의 태권도를 특집으로 다룬 월간 스포츠& 피트니스지 발행인 아무르 셀림은 "마스터 정은 이집트 스포츠의 별" 이라며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금메달을 따길 이집트인 모두 바라고 있다" 고 丁사범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丁사범은 " '사봄님, 사봄님' 하며 선수들이 믿고 따라주는 것이 가장 커다란 보람" 이라며 "태권도가 단순한 무술이나 운동경기가 아니라 정신적인 수양을 하는 도 (道) 임을 인식시켜 주고싶다" 고 말했다.

현지 한국인 학교 교사인 부인 추경연 (秋京然.50) 씨는 "속아서 왔다" 고 농담을 하며 "애 아버지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84년 15세이던 딸이 이제는 좋은 한국 청년을 만나 결혼했으면 하는 소망만은 이뤄졌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카이로 (이집트) =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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