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巨大談論'을 기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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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 신문사간부가 과학자모임에 갔다가 들은 얘기를 전하는데 과학자들의 불만이 대단하더라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국가경쟁력이 정보과학.기술에 크게 달려 있고, 지금 세계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끌고가는 거대한 정보질서재편에 들어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조차 없고 변화에 대처해 국익 (國益) 을 지키려는 아무런 노력도 찾아볼 수 없다고 개탄하더라는 것이다.

국가경영을 맡겠다고 나선 대통령후보라면 당연히 이런 문제를 정책으로 들고 나와야 할텐데 어느 후보도 언급하는 걸 못봤다는 것이다.

어찌 정보화 뿐이겠는가.

우리에겐 당장 경제회생이 급하고, 행정.교육.교통.환경 등 각 분야에서 그야말로 '빅뱅' 을 요구하는 거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21세기 청사진도 나와야겠고 북한문제.통일준비도 늦출 수 없는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정부와 정치인.지식인.온국민이 대들어 논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최선의 결론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거대한 과제들이 우리에겐 수없이 많다.

그러나 지금 이런 문제들을 누가 논의하고 있는가.

정부가 하고 있는가, 정치인이 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논의의 부재 (不在).실종 아닌가.

이런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비전과 정책을 내야 할 사람이 다름 아닌 대통령후보들인데 이들이 요즘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라곤 병역시비와 표몰이.지지율경쟁 뿐인 것같다.

물론 이회창 (李會昌) 대표 아들의 병역문제는 진상을 가리고 깨끗하게 결말을 내야 할 중요한 쟁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권 전체가 1백79㎝.45㎏ 문제와 병적기록부의 도장.기재사항을 놓고 1주일이고 열흘이고 매달리는 것은 나라의 불행이다.

야당의 병역공세에 여당은 70이 넘은 노인의 병역문제로 맞불을 놓지 않나, 누구 아버지의 일제시대 행적이 어떻고, 누구에게 몇억원이 숨어있는 계좌가 있고 없고…하는 따위의 약점캐기 뒷조사가 대선정국의 중심메뉴가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능한 정책참모가 누군지는 알 수 없어도 첩보수집에 능하고 약점 잘 캐는 참모가 각광받게 됐다.

곧 세기가 바뀌고 새 천년대 (千年代) 를 맞이하는데 누구도 21세기의 국가위상을 말하지도 않고 산적한 거대과제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

기껏 언급한다고 해봐야 수험생이 암기하듯 미리 준비한 답을 술술 늘어놓아 가슴에 와닿는 실감이 없다.

깊은 고민과 고통스런 모색끝에 나오지 않은 정책이라면 그게 무슨 실효성있는 정책이겠는가, 물가안정이니, 적정성장이니, 규제철폐니… 하는 판에 박은듯한 구호와 수사 (修辭) 같은 정책이 지금껏 나온 후보들의 정책이요, 비전일 뿐이다.

대선논의의 차원.스케일.수준.질 (質) 이 달라져야 겠다.

좀 더 높아지고 커져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맞고 있는 과제는 모조리 거대하고 차원높고 고도의 지성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논의는 작고 쩨쩨하고 유치하고 수준낮은 차원에서만 맴돌고 있다.

정치권의 그 숱한 성명이나 논평을 봐도 하나같이 그 모양이고 유치한 이벤트나 언행이 끊이지 않는다.

이래서는 안된다.

작고 쩨쩨한 논의, 유치하고 단순 호기심만 자극하는 논의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크고 도덕성높고 수준높은 리더십을 확보할 수 없다.

크고 차원높은 논의의 경쟁을 통해서라야 그런 리더십이 나올 수 있다.

대통령후보들은 이제부터라도 좀 국가대사에 대해 얘기해주기 바란다.

그저 과학기술진흥이니, 시장경제원칙이니 하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해법 (解法) 과 재원과 단계별 추진전략이 담긴 정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을 놓고 전문가끼리 토론이 벌어지고 후보진영끼리 공방이 오가는 담론 (談論) 의 장 (場) 을 열어야 한다.

물론 후보검증도 하자. 李대표 아들문제도 철저히 하고, 필요하면 후보 누구의 가족문제를 조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담론의 장을 아예 막아버리거나 격하.위축.저질화의 구실이 돼선 안될 것이다.

지금같은 세기적 대전환기에서 산적한 국가과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라면 대선주자로서 국민에게 감동을 주고 심금을 울릴 '큰 말' 들과 '큰 그림' 들이 당연히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지금 '거대담론 (巨大談論)' 에 목말라하고 있다.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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