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에릭 홉스봄 지음 '극단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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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가속화되는 과학기술 혁명과 환경파괴, 그리고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들. 우리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은 앞선 세대가 살아온 과거와는 철저히 단절된 채, 소비사회의 풍요 속에 자족하고 있다.

이런 혼돈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역사서가 바로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쓴 '극단의 시대' 다 (까치刊) . 대다수의 개설적인 역사서들은 지난 50.60년대를 다루는 것이 고작인데 비해, '극단의 시대' 는 1914년부터 1990년까지의 세계사를 총망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정치사가 중심이 되는 기존의 경우와는 달리 경제와 사회, 그리고 문화혁명을 함께 고찰하고 있다.

홈스봄은 1914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시작되는 제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파국의 시대' 가 시작됐다고 본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총력전이 등장하여, 이때부터 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군인 희생자를 압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5년 이후 규격화된 노동을 강조하는 포드주의의 등장과 가속된 기술혁명으로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황금빛 시대' 가 열렸으나, 지난 73년 오일쇼크를 계기로 세계사는 서서히 '붕괴의 시대' 에 접어든다는 것이다.

대중실업, 제3세계 국가들의 극심한 기아, 그리고 각국 정치체제의 위기가 바로 세기말의 암담한 현실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경제적 현실의 배후에 놓인 사회.문화적 혁명은 홉스봄에게는 더 심각한 세기말적 위기증후다.

이는 한편으로 우선 농업구조 재조정을 통한 농민의 급격한 감소와 도시화, 노동운동의 분열, 그리고 사회복지제도의 약화를 통한 걸인과 범죄자의 증대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홉스봄은 통속적이고 도덕률 폐기적인 청소년문화와 가족의 해체를 지적하면서, 이런 문화혁명이 초래할 사회적 위기를 경고한다.

이는 사회에 대한 개인의 승리, 즉 근대사회를 지탱해 온 가치체계와 인간들간의 사회적 유대, 양자 (兩者) 의 해체를 의미한다.

홉스봄이 보기에 이런 위기들의 근저에는 전세계 정부들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본주의 경제의 전지구화' 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극단의 시대' 에서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역할이 강조된 반면, 민족주의나 민족국가의 역할이 소략하게 취급되고 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민족주의 물결이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전쟁을 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 그는 컴퓨터에 통달한 청소년들, 그들과 대중문화의 결합이 지닌 위기적 상황을 제대로 포착하였으나 그의 견해는 약간 과장됐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젊은이들의 문화는 대체로 비정치적이어서 앞선 세대가 만들어낸 거대한 사회제도를 붕괴하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한가지 묘미는 한국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다.

그는 제3세계중 특이하게 돌출한 국가로 한국을 5~6군데서 언급한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제3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념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높은 문자해독률, 그리고 교육열등을 들며 제3세계는 빈곤하고 문화적으로도 저열한 곳이라는 편견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제3세계 개념의 다양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성공에 대한 그의 역사적 분석이 완벽하진 못하지만, 세계사 속에서 한국을 자리매김하는 그의 시도가 반갑다.

이 대목에서 평소에 그가 주장하던 제3세계 역사에 대한 애정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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