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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열전]5.임권택 감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영화감독 임권택. 한국 영화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켜온 그는 백전노장답게 지금 이 시간도 촬영 현장에서 혹독한 무더위 속에 땀을 흘리며 새로운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그의 영화적 생명력은 결코 우연이나 행운과는 거리가 멀다.

남다른 자기관리와 예비, 부단한 탐구와 노력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며 그것은 어쩌면 그에게 숙명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격동의 80년대초, 필자는 민족 분단문제를 다룬 '짝코' 의 시나리오 작업과 함께 그와 만난후, 10여년 동안을 하루같이 동고동락했다.

유혈이 낭자했던 광주 민주화운동이 끝내 좌절로 스러지면서 모두가 허탈했던 그 무렵, 임감독과 필자는 영화도 이제 변해야한다는 자기 성찰과 함께 도식적인 종래의 틀 (반공과 계도성 일변도의 국책영화) 을 벗어나려는 의식이 은연중 손을 잡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임감독과 필자는 동지를 만난듯 의기투합했고, 그 무렵이 두 사람에겐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여관에 들어가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고 임감독과 필자는 한달가량을 한 방에서 뒹굴었다.

작품에 관해 토론을 하다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얘기할 때 눈물이 나도록 웃어대던 그의 소년처럼 천진스런 모습과 그렇게 웃다가도 금새 정색을 하며 "내가 너무 웃는 거 아닌가?" 하며 자신을 추스르는 모습. 어려웠던 소년 시절부터 영화에 입문해 척박한 환경에 시달렸을텐데도 그의 정신은 순수했고 천연스러웠으며, 그 반면엔 늘 자기제어의 차가운 절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즐길 줄을 안다.

촬영현장에서 휴식을 취할 때 스탭들을 웃기는 주인공은 늘 그였다.

어쩌면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도 그의 작품은 재미있을 것이다.

그만큼 유머 감각이 좋다.

눌변이지만 말 속엔 주제가 분명하고, 감성도 풍부해 여린 마음이 배어날 때도 있다.

언젠가 촬영현장에서 친구 (촬영현장 답사를 도와준 지방 경찰관) 의 부음을 듣고, 그는 한참을 말없이 술을 마시더니 살며시 사라졌다.

의아해서 찾아보니 그는 방의 문고리를 잡고 어둠속에서 혼자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그것은 슬픈 자의 참 모습이었다.

그는 자기 과시와 위선과 교활함을 가장 가증스러워했다.

따라서 그는 진솔함을 가장 사랑한다.

잘못이 있어도 솔직하면 통과된다.

남도의 어느 절에서 '만다라' 를 찍고 있을 때 조감독 (당시 곽지균감독) 과 함께 현장에 내려갔는데, 부인이 인편에 밑반찬과 러브레터를 보낸 적이 있다.

궁금해서 내용을 훔쳐보다가 조감독이 경악하고 빼앗는 바람에 편지가 찢어졌다.

필자도 당황해 그것을 밥풀로 붙여 가까스로 원형만 유지해 봉투에 넣었다.

조감독은 울상이었다.

그 편지를 그에게 전하면서 자수를 했다.

피식 웃고마는 그의 표정을 보자 조감독의 얼굴에도 핏기가 돌았다.

그는 그것을 점퍼속에 숨겨 가지고 다니다가 세탁을 하는 바람에 부인에게 들켰다고 한다.

그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또 하나 있다.

그의 동료인 정진우 감독이 영협 이사장에 출마했던 때, 그는 선거대책 본부장이란 거창한 직책과 선거자금까지 맡았다.

당시 선거전은 자못 치열했고, 영화인들도 줄서기, 줄세우기에 바빴다.

그는 침식을 잃을만큼 선거전에 열중했다.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되어 식당에서 누룽지 미음을 마련해 먹게 할 정도였다.

마침내 선거 전야. 잘 나가던 그가 그만 상대편 매터도에 걸려들고 말았다.

내용인즉, 임감독의 비리를 모두 폭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심 난감한 빛이었다.

선거 날이 닥쳤다.

찬조 연사로 등단한 그의 말이 이상하게 헛바퀴를 돌았다.

대부분은 그가 어눌한 탓으로 돌렸지만, 그의 눈만 봐도 심정까지 낌새를 채는 필자는 당황했다.

정진우 감독의 승리로 선거가 끝나자, 그에게 달려간 필자에게 임감독은 뜬금없이 소주 한병 사다가 마지막으로 한잔 하자고 말했다.

선거장에서 대낮에 소주는 무엇이며 마지막이란 말은 또 무엇인지 황당했다.

겨우 달래어 밖으로 나온 필자를 한켠으로 부르더니 그는 자못 비장하게 말했다.

"잘 있어. 내가 빨갱이라고 잡아간대. 그리고 누구한테 전해줄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절반가량 쓴 죄도 있고, 어떤 여자랑 하룻밤 연애한 죄도 있고. 저기 형사가 서 있잖아. " 돌아보니 진짜 중부 경찰서 영화 담당 정보계 형사였다.

필자까지 돌 지경이었다.

그는 정진우 감독의 주선으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의 정신이 잠깐 나가버린 것이다.

그날 밤 늦게 임감독한테 전화가 왔다.

"어떻게 된 거요?" "낮에 내가 잠깐 돌았던 모양이여. " "아주머니한테 그 말은 안했죠?

여자 얘기…" "다 불어버린 모양이여…" "예?!" "화가 나서 나가고 집에 없어. 야단났는디…어째야 좋지?" "형님도 참, 그 말은 죽어도 하지말라고 신신당부했는디…" 무엇보다 그가 호전되어 기뻤지만 앞 일이 암담했다.

그러나 요행 부인이 너그럽게 감싸안음으로써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잠시나마 그를 돌게 한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빨갱이' 라는 매터도였다.

분단의 깊은 상처를 입은 그의 암울한 가족사가 원흉이었다.

그와 필자는 정신적 연좌제에 묶여 늘 불안하고 찜찜한 세월을 보내오던 터였으니 그것을 폭로하겠다는 매터도는 그 자신에겐 실로 큰 충격이었으며, 그의 정신을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듯 그의 인간적인 품성은 간결하고 솔직하다.

부인한텐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도 말해선 안된다는 스캔들을 자수하고 광명찾았으니.

그는 달인이라는 말을 즐겨쓴다.

백척간두에서 한발 내딛는 그 경지. 그 동안의 그의 작업은 어쩌면 그 경지를 향해 부단히 이어져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영화에 대하여, 영화의 영원한 화두인 인간에 대하여, 나아가 자기완성을 위한 또 하나의 커다란 깨달음일 것이다.

임권택 감독. 이젠 그도 달인의 경지에 이르고있지않나 싶다.

지금 하고있는 작품 '娼' 이 아무쪼록 훌륭하게 완성되어 다음 국제영화제에선 큰 영광 얻어내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송길한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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