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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00> 차이어와 위안스카이의 은원<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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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의 권력 기반이던 북양군이 훈련받고 있다(왼쪽 사진). 황제 즉위 직전의 위안스카이(오른쪽 사진). 김명호 제공

1913년 가을 위안스카이는 쑨원의 제2차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쑨은 또다시 망명했다. 국회는 정식으로 위안을 대총통에 선출했다. 얕잡아 보아도 좋을 행동들을 서슴지 않는 의원들이 속출했다.

위안은 “민주와 자유를 남용하는 유치한 수준의 집단”이라며 국회를 해산시키고 내각제도 총통제로 바꿔버렸다. 총통의 임기는 10년이었다. 횟수에 상관없이 연임할 수 있고 후임을 지명할 수 있도록 선거법도 바꿨다.

정점에 도달한 사람만이 느끼는 위기감이 위안을 엄습했다. 최강의 무장집단인 북양군이 위안스카이 정권의 원천이었다. 공화제가 존속하는 한 과도기일 수밖에 없었다. 위안은 모험을 시도했다.

1915년 8월 주안회(籌安會)라는 단체가 탄생했다. ‘전국청원연합회’ 등 온갖 명칭의 단체가 뒤를 이었다. 포주들은 ‘기녀청원단’을 결성했고 거지왕초는 ‘거지청원단’을 발족시켜 조직력을 과시했다. 공화제를 폐지하고 군주제를 부활시키자는 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차이어도 “중국의 국체는 군주제가 됨이 마땅하다”며 12명의 장군이 작성한 성명서의 첫머리에 서명했다. 다음 날부터 사창가에 틀어박혀 주색에 탐닉했다. 백주에 기녀들과 산책하며 자신을 외부에 노출시켰다. 항상 단정하고 근엄했던 차이의 망가진 행동에 관한 정보를 보고받을 때마다 위안은 긴장했다. 차이도 위안이 미혹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위안은 “황제를 하건 말건 네 멋대로 해라. 나는 관여치 않겠다”는 의미로 단정했다. 등극대전주비처(登極大典籌備處)는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이 이듬해 1월 1일이라고 발표했다. 국호는 ‘중화제국’이었다.

차이는 “따뜻하고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치병에 전념하겠다”며 병가를 청했다.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다. 위안은 일본으로 갈 것을 허락했다. 호랑이를 풀어준 장본인은 위안이었다. 차이는 11월 11일 베이징을 떠났다. 목적지는 2년 전까지 자신의 근거지였던 윈난(雲南)이었다.

차이어가 떠난 후 위안스카이는 “명석하고 예민함은 당대에 차이를 따를 자가 없다. 황싱(黃興)과 쑹자오런(宋敎人)을 합친다 해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주위사람들에게 했다. 이홍장(李鴻章)이 세상을 떠나며 “당대의 재자(才子)들 중 위안스카이를 능가할 인물은 없다”며 위안에게 애정을 표현했듯이 위안도 차이에 대한 배려가 지극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차이어는 윈난의 지휘관들에게 “선혈을 뿌리며 이룩한 공화제가 군주제로 돌아가는 것은 4억 중국인의 수준과 인격에 관한 문제”라는 서신을 발송했다. 일본·대만·홍콩·하노이를 경유해 12월 19일 새벽 쿤밍에 도착했다. 33번째 생일 다음 날이었다.

상하이에 있던 량치차오(梁啓超)는 차이어가 일본을 떠나며 보낸 편지를 받았다. “실패하면 죽음이 있을 뿐 망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성공하면 은퇴하겠습니다. 그 어떤 관직에도 나가지 않겠습니다.” 간단하지만 무서운 내용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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