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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요즘 공연장 대세는 ‘풍선 든 남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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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바야흐로 ‘남성 팬덤(fandom·특정 연예인 혹은 어떤 분야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현상)’의 시대다. 요즘 방송의 음악프로 공개방송 현장은 오빠들을 보러온 소녀팬들 대신 10~30대의 남성팬들이 점령했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등 여성 아이돌 그룹이 인기를 끌면서 그동안 음지에서 활동하던 남성들이 본격적으로 연예인 팬덤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13일 KBS 음악순위프로 ‘뮤직뱅크’녹화장에서 소녀시대가 ‘지(Gee’로 1위를 차지하자 남성팬들이 풍선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예전부터 달려나오고 싶었다”=13일 오후 KBS 음악 프로그램 ‘뮤직뱅크’ 녹화장 앞. 수백명의 팬이 방송 서너 시간 전부터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특별한 점은 플래카드와 풍선을 들고 줄을 선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남자라는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 이 프로에 ‘소녀시대’와 ‘카라’가 출연하기 때문이다.

남성 관객 중에는 20~30대 이상으로 보이는 이도 상당수다. 인터넷 사이트 다음(daum)의 소녀시대 팬 사이트 회원이라는 김명근(27)씨는 요즘 일주일에 한두 번, 많을 땐 세 번씩 방송국에 온다. 소녀시대 데뷔 당시부터 팬이었지만 직접 응원을 나온 것은 최근부터다. 김씨는 “예전엔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건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사이트에서도 20~30대 남자들이 10대보다 더 열심히 활동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최모(21)씨는 이날 방송에 신곡 ‘허니’로 컴백하는 카라를 보러 왔다며 “주변 친구들도 다들 ‘카라’ 아니면 ‘소녀시대’ ‘원더걸스’의 팬이다. 오늘 ‘카라 보러 간다’고 하니 다들 부러워했다”고 자랑했다.

소녀시대.


◆스타로 ‘놀이’하는 남자들=10년 전 소녀그룹 ‘SES’ ‘핑클’에게도 남성팬은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소수만 공연장을 찾아와 ‘핑클 짱’을 외쳤을 뿐,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팬클럽 등을 만들어 정보를 교환하며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김은아 홍보팀장은 “예전 남자팬들이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선물을 보내는 식이었다면, ‘소녀시대’ 팬들은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고 공개방송이나 팬 사인회 등에 적극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씨는 “여성팬들이 남성 아이돌을 ‘숭배’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남성팬들은 여성 아이돌을 소재로 삼아 다양한 ‘놀이’를 즐기는 것이 특징”이라며 “최근의 남성 팬덤은 이런 놀이 문화가 일부만의 것에서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소녀시대’의 팬들이 공연장에서 보여주는 ‘집단 응원’도 남자팬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놀이의 한 가지다. 스타를 모델로 한 각종 UCC 제작과 ‘움짤(공연이나 뮤직비디오의 주요 장면을 캡처해 만든 움직이는 사진) 놀이’ 등에 열중하는 것도 남성 팬덤이 보이는 특징이다. 최근 동영상 사이트에는 ‘지’를 군인버전과 남성 버전 등으로 패러디한 각종 음원과 동영상이 수없이 올라온다.

◆한국판 ‘오타게 문화’ 시작되나=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 소녀그룹 ‘모닝구 무스메’의 인기와 함께 남성 팬덤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남성팬들의 약간 과격한 응원인 ‘오타게(ヲタ芸) 문화’도 생겨났다. ‘오타쿠(한 분야에 깊이 빠진 사람)들의 예술’로 해석되는 ‘오타게’는 남성팬들이 여성 아이돌의 공연장 등에서 집단으로 독특한 안무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뜻한다. 최근 ‘카라’의 팬들이 ‘프리티 걸’ 공연에 단체로 고무장갑을 끼고 와 “예예예예~”를 외치거나 ‘휴지 응원’ 등을 계획한 것도 이 같은 오타게 문화의 전초로 읽힌다.

남성팬들의 열띤 응원 속에 13일 뮤직뱅크에서는 ‘소녀시대’가 ‘지’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위가 발표되는 순간, 방송 내내 구석에서 점잖게 자리를 지키던 40대 아저씨 팬 한 명이 스프링처럼 의자에서 튀어오르며 환호했다. 아들 뻘 되는 옆자리 10대 남학생이 ‘그 마음 안다’는 듯 아저씨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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