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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집시' 곡예사들의 일과 생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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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아직 술이 덜 깨어 뻐개지는듯한 머리를 들고 하명이 눈을 떴을때 기차는 창밖으로 바다를 끼고 달리고 있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준령을 넘어 이제부터 동해안을 누비는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 (한수산의 '浮草' 중) 그들은 늘 떠난다.

박수와 환호가 있는 곳으로. 자신들의 '예술' 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곡예단원들의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떠나기 위해 사는 그들이기에. 72개 컨테이너에 꿈을 싣고 바다를 넘나 드는 이들이 있다.

1백명의 런던 로열 서커스단 단원들. 이번에는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여의도에 천막말뚝을 박았다.

녹아내릴듯 지글거리는 한여름 아스팔트위에. 한 나라에 자리를 잡으면 보통 1년정도 공연한다.

7월4일부터 8월22일까지 서울공연과 11월20일까지 광주.대구.부산 순회공연을 벌이는 '코리아투어 20주' 는 그리 긴 편은 아니다.

말이 런던로열서커스지 단원중 영국사람은 세명 뿐이다.

단장은 말레이시아 국적의 중국인 폴 리 (53) 씨. 러시아 출신이 18명으로 제일 많고 필리핀.인도네시아.멕시코.말레이시아등 14개국의 단원.스탭들로 이루어진 다국적 단체다.

"세계 각국의 가장 우수한 단원을 모았기 때문" 이라는 것이 단장 폴의 설명이다.

인터넷을 모르면 사람 취급도 못받는다는 첨단 멀티미디어 시대인 요즘, 나팔로 팡파레를 불러제끼는 악단을 뒤로 하고 공중그네를 타며 동물쇼를 벌이는 서커스는 뭔가 아귀가 안맞는 듯한 느낌이다.

그 엇갈림의 중심에 있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적당한 공터와 소방용 비상호스관 하나만 있으면 그곳은 곧 이들의 삶의 터전이 된다.

컨테이너 두개는 자체 발전소로 전기를 공급한다.

집도 컨테이너다.

길이 15.높이 2.폭 3쯤 되는 컨테이너 하나에 두 가구가 생활한다.

내부는 17평. 집주인 취향이나 생활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침대와 옷장.소파.TV.비디오.탁자.냉장고.싱크대.주방기기등이 오밀조밀 들어있다.

에어컨은 필수. 가족이 있는 단원들은 시장을 봐서 요리를 한다.

사먹을 때는 주로 피자나 햄버거.치킨.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다보니 입맛도 그렇게 변했나보다.

집은 있고 차는 필요없는 만큼 대부분의 단원들이 먹는데 돈을 쓴다.

떠도는 생활이라 건강관리에 특히 신경을 쓰는 눈치가 역력하다.

자체설치한 파라볼라 안테나를 통해 공연이 없을 때면 위성방송을 주로 본다.

화장실과 샤워장은 공동으로 이용한다.

집집마다 문앞에 빨래를 널어 놓아 LG빌딩 주변은 마치 난민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단장의 집은 일반 단원들의 것과 격이 다르다.

미국의 유명한 캠핑카 전문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의뢰했다는 그의 컨테이너는 한마디로 일류호텔 수준. 연한 갈색 천연가죽 소파, 모양과 색이 커튼과 조화를 이루는 고급 카펫, 최고급 TV.오디오 세트, 샤워부스와 세탁기, 거울로 둘러 싸인 침실, 그리고 부엌 탁자 위엔 프랑스산 적포도주 메독 4병이 시원하고 쾌적한 에어컨 바람속에 누워 있다.

이 들에게 한국은 불편한 나라다.

관람객 반응은 뜨겁지만 말이 안통해 안타까워 한다.

사람 만나는 재미로 각국을 다니는 이들에게 말이 안통한다는 것은 사는 재미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영어마저 못하는 남미.러시아 단원들은 더욱 죽을 맛이다.

그래서 공연이 없는 월요일이면 영어를 하는 단원을 옆에 끼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태원.롯데월드 같은 데로 나가 재미난 구경도 하고 옷도 산다.

페이는 주급제다.

미화를 현지 돈으로 환산해 받는다.

각 개인마다 액수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얼마 받는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돈얘기만 나오면 하나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 가족을 통해 어렵사리 얘기를 들었다.

5대째 서커스를 한다는 30년 경력의 최고참이자 광대역을 맡고 있는 멕시코 출신의 바벨리토.콜리야 부부. 장남 데이비드 (8) 는 최연소 공중그네 아티스트다.

어머니와 2남1녀를 부양하는 이들 부부가 아들몫을 포함해 한주일에 받는 액수는 8백50불 (약 76만원) .월수 약3백만원이라는 얘기다.

보너스가 없고 노모 부양에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마흔 다섯살의 그에게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다.

요즘엔 데이비드가 컴퓨터를 사달라고 하도 졸라서 돈을 따로 모으고 있다.

쓰고 남는 돈은 고국으로 송금하는 사람이 많다.

말레이시아에 있는 서커스 에이전시를 통해 다른 공연단에서 공연하는 친척들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주고 받으며 안부를 확인한다.

주로 현금을 쓰는데다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신용카드는 거의 없다.

하나의 움직이는 마을인만큼 가족을 이루거나 동거하는 커플이 생기고 자연 아이들도 늘어간다.

십여명이 되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잘 논다.

말은 주로 영어로 하지만 스페인어나 말레이시아어를 섞어 쓰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서커스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레 서커스 단원이 된다.

사자와 호랑이 쇼를 맡고있는 총매니저 압둘 고마리 (39) 도 일곱살때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집시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공중그네를 익혔으나 어느날 사자가 공연도중 조련사를 물어 죽이는 것을 보고 묘한 도전감이 생겨 전공을 바꿨다.

영화 '007 옥토퍼시' 에 스턴트 맨으로 잠시 외도를 했지만 다시 서커스로 돌아왔다.

러시아 주니어 체조대표로 유럽 챔피언 출신의 안드레이 (22) .부상으로 대표팀을 나와 러시아 서커스단에서 공연하던중 스카우트됐다.

아직 젊은 만큼 일단 공중그네에 충실하겠다는 목표로 새로운 묘기를 연구중이다.

아 들 드미트리 (23) 와 함께 새와 고양이 묘기를 하는 러시아의 마야 (44) .일본 서커스단에서 공연할 때보다 돈을 적게 받는게 불만이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며느리는 댄서로 있는데 시어머니를 잘 모시느냐는 질문에 '가끔' 와서 밥을 해준다고 말한다.

도미니카 출신의 호세 (35) .그의 부모는 작업인부였으나 어려서부터 묘기를 익혀 아티스트가 된 경우다.

필리핀 공연중 서커스단 비서로 일하던 아나링을 만나 결혼, 1남1녀를 두었다.

이 서커스단의 하이라이트 공연인 서스펜스휠과 오토바이타기, 고공 줄타기를 해내는 스타다.

곡예사 출신이 아닌 아나링은 큰아들 마틴에게는 정규교육을 시킬 생각이다.

앞으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미 말레이시아에 4살부터 입학이 가능한 기숙사 딸린 학교도 봐두었다.

이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내일을 믿지 않는다.

하루하루 즐거우면 그뿐이다.

" (압둘) "가족들이 모두 즐길만한 공연으로 서커스만한 게 없다.

아직은 장사가 된다.

" (폴) "하루하루 느낌이 다르다.

40살이 넘으면 다른 직업을 갖고 싶다.

그래서 틈틈이 용접일을 배우고 있다.

" (호세) 공연이 끝나는 시간은 보통 밤 11시. 이 때부터 내일 공연을 위한 연습에 들어간다.

시간제한은 없다.

늘 하던 연습이지만 마음에 드는 동작이 나와야 잠을 청한다.

그래서 천막 안에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그 불빛이 연소하는 것은 '현대판 집시' 인 이들의 꿈과 땀이기 때문이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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