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갔다고? … 음악에 은퇴는 없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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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에게 필요한 리더십이 있으신가요.”

“제가 이래 봬도 인기가 아주 좋습니다. 허허.”

11일 오전 11시 서울 상계 3·4동 복합청사 공연장. ‘노원구립 실버악단’ 오디션에 참가한 김종화(77)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긴장하는 모습을 감추지는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면접을 마친 그가 오르간 앞에 앉았다. 비틀스의 ‘Let it be’를 연주하자 공연장은 금세 흥겨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11일 노원구 상계 3·4동 복합청사에서 열린 ‘노원구립 실버악단’ 오디션에서 참가자들이 ‘고향의 봄’을 연주하고 있다. 왼쪽부터 트럼펫의 조재호(70)·전상오(66)씨, 아코디언의 송기(59)·김기철(61)씨. 이들은 입을 모아 "우리의 열정은 젊은이 못지 않다”고 말했다. 최종 합격자는 13일 발표한다. [강정현 기자]


트럼펫·색소폰·오르간·아코디언 등 연주자 13명을 뽑는 이날 오디션에는 43명이 몰려 경쟁률이 3대 1을 넘었다. 평균연령은 66.5세. 군악대 단장, 중학교 음악 교사, 뮤지컬 감독까지 경력도 다채롭다.

단장직에 응시한 김씨는 지난해 충무아트홀에서 공연된 뮤지컬 ‘실버파워’의 음악감독이었다. 18세 때 처음 건반을 두드렸다는 그는 한국전쟁 때 미군 위문공연 악단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후 50여 년 동안 조선호텔 악단, 롯데호텔 악단 등 40여 개의 악단을 거쳤다. 먹고살기 힘들 때도, 아내의 빈자리로 외로움을 가누지 못할 때도 음악만이 그를 위로했다. “6년 전 아내가 유방암으로 먼저 떠났어요. 병간호만 5년 했지….” 그의 눈가에 잠시 물기가 어렸다. 그는 “대부분 노인을 한물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다”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오디션 참가자 중 최고령자는 79세의 최재원 할아버지. 그는 기다리는 내내 아코디언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던 그는 ‘베사메 무초’를 애잔하게 연주해냈다. 최연소자 신현숙(51·여)씨는 색소폰을 들고 왔다. “5년 전 남이섬에 놀러 가서 들은 색소폰 연주가 멋있어 배우게 됐다”며 “떨려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즐거웠다”고 수줍게 말했다.

참가자들이 노령인 만큼 면접에서는 건강한지를 묻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 중학교 음악교사였던 유재환(68) 할아버지는 “체력은 체육교사보다 더 좋습니다”고 큰소리로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트럼펫과 색소폰을 잡은 주름진 손은 마디마디 굵게 세월이 스몄지만 오디션 현장은 아이돌을 꿈꾸는 청소년들의 무대 같았다. 5명의 심사위원도 진땀을 흘렸다. 염광여고 밴드부를 지도하는 이영노 교사는 “경력과 능력도 보지만 다른 사람과 음악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본다”며 “다들 쟁쟁해 합격자를 가리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무대 뒤의 대기실도 흥겨웠다. 드럼을 치는 이철(66) 할아버지가 권명선(77)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형님은 음악 언제부터 했수.” 권 할아버지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했지”라고 답하자 곧바로 이 할아버지가 농을 던졌다. “그래서 담배 비슷한 거(색소폰) 부는구먼.” 순식간에 웃음이 터졌다.

임주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실버악단=50세 이상 돼야 단원이 될 자격이 있다. 오르간·아코디언·드럼·바이올린 등 8개 악기, 13명으로 3월 창단될 예정이다. 문화행사, 노인 위문 행사 때 공연한다. 단원의 임기는 2년(연장 가능)이며 매월 30만원의 활동비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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