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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작가들, 태고와 교감하기 세계오지 '명상여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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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결국 내가 휘이훠이 이르는 곳은/돈황 천불동/그리하여 서장 (西藏) 만리 산 우는 소리에/그대 울음소리는 없어져 버린다.

/돌아보건대/천축 (天竺) 다섯 나라는 무명 (無明) 일 뿐/그대의 행방불명 앞에서/나는 이슬과 이슬비로 돌아온다.

//딱도 해라. 공부 놓으면 거기가 벼랑 천길!" 고은 (高銀) 시인이 20여년 전에 발표한 시 '나의 왕오천축국전' 마지막 부분이다.

제주 해협에서 자살까지 시도했던 허무주의자 高씨는 이 시 발표 무렵부터 현실주의.진보주의 시인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민중시를 발표하며 그 중간결산인 '만인보' 를 15권까지 펴낸 高씨는 지난달 19일 출판기념회를 갖고 다음날 서장 (티베트) 만리 넘어 천축 (인도) 으로 떠났다.

올 여름 유난히도 高씨처럼 세계의 오지 (奧地) 로 '고행길' 에 오르는 문인들이 많다.

그 고행을 통해 삶과 문학을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공부를 놓아버리고 벼랑 천길로, 뜨거운 사막으로, 설산 (雪山) 으로 들어가고들 있다.

"벗들, 어디가서 실컷 울부짖든지, 미치든지 한 다음 피투성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시작만이 구원입니다" 는 인삿말을 남기고 高씨는 신라의 구도승 혜초 (慧超) 의 발자취를 좇아갔다.

옛 당의 수도 시안 (西安)에서 천불동이 있는 둔황 (敦煌) 을 거쳐 티베트의 라사, 그리고 카일라스산을 거쳐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다는 수미산 (須彌山) 을 찾아. 해와 달.별등 천계 (天界) 와의 대화의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는 그 고산지대에서 高씨는 태고와, 우주와의 대화를 나누려 했다.

그리고 초발심으로 돌아가 무언가 새로 시작하는 힘을 얻으려 한 것이다.

태고의 시간과의 하염없는 대화를 통해 이미 시간의 적이 되어버린 자신을 씻었다.

하루하루의 시간이나 매체에 철저하게 종속된 시와 소설, 그래 죽어가는 문학을 시간이 잠든 태고와의 교감을 통해 다시 살리기 위해 高씨는 뜨거운 사막과 설산을 한달남짓 헤매다 22일께 돌아올 예정이다.

지금까지 시간에 쫓기고 지배당했던 자신의 정신과 문학을 태고에 기소 (起訴) 하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 (宋基元) 씨도 구도소설 '청산' 을 낸 직후인 지난 5월2일 인도 니시케시를 향해 떠났다.

갠지스강 상류에 있는 히말라야 산자락 힌두교 성지이자 명상의 마을인 그곳에서 2년간 머무르며 자신을 방목하기 위하여. 70, 80년대를 민중문학의 최일선에서 '복무' 했던 宋씨는 90년대 들어 국선도에 빠져들며 주변의 문인들에게 "국선도가 좋긴 좋은데 큰탈 났어야. 자꾸 세상과 멀어지고 싶으니" 라는 심사를 털어놓곤 했다.

그러다 96년부터 삭발하고 계룡산과 지리산에서 본격적으로 도를 닦던 그가 속세와 더 멀리 떨어져 홍진 (紅塵) 을 씻기 위해 인도로 간 것이다.

장터와 뒷골목, 그리고 최류탄 터지는 시위 현장에서 민중의 도, 문학의 도를 깨쳐온 宋씨. "깨달음을 얻는 도는 종교와 수행 방법을 뛰어너머 한 곳에서 만난다" 는 송씨는 민중.중생을 위무할 수 있는 큰 도를 구하기 위해 세계의 구도자들과 함께 히말라야 더 높은 곳으로 자꾸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소설가 김주영 (金周榮) 씨도 6월 30일부터 지난 9일까지 파키스탄 훈자에 다녀왔다.

인근 어느 도시에서부터도 깎아지른 낭떨어지 1차선 차도를 목숨 걸고 최소 6시간 이상 달려야 도달하는 히말라야 산자락의 작은 마을 훈자는 장수촌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외국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나 보여줄 풍물은 없다.

단지 헐벗은 첩첩의 바위산 너머로 설산과 산을 비껴 뜨는 달만이 시선을 붙드는 곳. 그 황량한 풍경을 위해, 또 대하소설 '객주' 의 '장똘뱅이 작가' 로서 가슴에 각인된 그 무엇을 환기시키려 金씨는 그곳으로 향했다.

보잘 것 없는 손으로 밀가루 전병을 파는 건강한 아낙네, 고무줄을 어깨에 늘어뜨리고 팔러 다니는 사내, 길가 점방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원색의 색소를 뽐내며 목마른 손님을 기다리는 음료수, 대장간과 신기류 장수에게서 새어나오는 크고 작은 망치소리를 듣고 볼 수 있는 작은 장터. 우리가 한두 세대 전에 발전해 나온 그 장터를 확인하려고 金씨는 목숨 걸고 그곳에 다녀왔다.

다음 세기에 인간을 지키기 위한 문학의 흐름은 이미 세계의 오지를 향한 문인들의 고행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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