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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⑤ 이문환 → 김중혁 『악기들의 도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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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문환씨는 “주중엔 기자, 주말에는 철저히 작가가 된다”고 말했다. 기자로서의 문체와 작가로서의 문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전업 소설가에 비하자면 과작인 그는 “이번 기회에 분발해 내년께 연작소설집 한권 낼 수 있도록 열심히 쓰겠다”고 말했다. [이문환 제공]

김중혁은 딱 두 번 만났다.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겨울이었다. 한 출판사의 송년회에서 우연찮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데뷔작을 갓 발표한 신예 작가. 나는 등단 5년차인데도 아직 책 한 권 내지 못한 무명이었다. 서로의 작품에 대해 할 말이 딱히 없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사람처럼 우리는 몇 마디 단어를 띄엄띄엄 내뱉기만 했다. 그러다 누군가 SF소설 혹은 과학기술을 화제로 올렸던 것 같다. 그래,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

휴대전화·PDA·인터넷과 네트워크 기술 등 타인의 경계를 허물고 관계를 변화시키는 정보통신의 마술. 어색한 침묵은 깨졌고, 당시 나름 ‘얼리 어댑터’였던 내가 늘 갖고 다녔던 서브노트북과 PDA를 테이블에 자랑삼아 꺼내놓자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만져봐도 될까요?”

그의 이름은 이튿날이 되기 전에 잊어버렸다. 먹고사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기억력이 엉망이 될 때가 있다. 이후 『펭귄 뉴스』를 비롯한 그의 작품 속 보기 드문 매니아적 감수성을 흥미로워하면서도 작가 김중혁이 2000년의 ‘그’인 줄은 몰랐다.

사실을 안 것은 2006년 겨울, 6년 전과 동일한 출판사의 송년회에서였다. 아하, 그랬구나. 그의 작품 속 살아있는 ‘기즈모(gizmo)’들의 세계가 어디에 근원을 두었는지 뒤늦게나마, 슬쩍 들여다 본 기분이었다.

기즈모의 사전적 의미는 ‘기계 장치’다. 아톰·마징가·건담 시리즈와 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란 1970년대 이후 세대에게 그러나 기계 장치는 쇠붙이나 유기화합물 덩어리가 아닌 살아있는 생물이다. 김중혁의 작품 속 사물들도 살아 숨쉰다. 자극에 반응하고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체계를 갖춘, 독자적인 삶을 사는 존재다. 지루한 일상을 참다 못해 홀연히 사라지는 일탈을 감행하는, 단편 ‘무방향 버스’의 버스처럼.

김중혁은 소설가와 음악가·철학가·감독, 책과 음반 등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와 텍스트를 열거하며 스스로를 레고 블록 덩어리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가 때로는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충돌하는, 상이한 욕구와 욕망의 기계-기즈모로 이뤄진 또 하나의 기즈모 아닌가? 디지털 장치에 생체 정보를 기록하는 라이프로그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디지털 단위로 재조립하고 삶을 0과 1의 비트를 리믹스하는 행위로 변화시키고 있다.

인간이 기즈모이기에, 인간을 사랑하기에 기즈모를 사랑할 수 있고 기즈모를 사랑하기에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김중혁의 소설에서 내가 느끼는 정조(情調)가 그렇다.

피와 점액질로 범벅이 된 어둠의 환상 속에서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 내가 포착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성 혹은 시대성이 그렇다. 그래서 이따금, 어쩌면 종종, 그의 능력과 감수성이 부럽다.

◆악기들의 도서관(2008·문학동네)=김중혁(38)씨의 두 번째 소설집. 피아니스트, DJ 지망생, 공연 기획자, 악기점 주인 등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을 모은 이 책은 ‘여덟 곡의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라 불릴 만하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문자로 형상화한 기발한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지난해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수록 단편 중 ‘엇박자D’로 김유정문학상을 받았다.

◆이문환=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 작가다.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헤럴드경제신문 산업부에서 정유와 석유화학을 담당하는 현직 기자. 문단에서 보기 드문 이력이다. 주간지 ‘시사저널’에서 소설가 김훈과 시인 이문재를 상사로 모시고 일하기도 했다. 199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럭셔리 걸』(2003·문학동네)이 있다.



◆다음주 월요일(16일)자에서는 김중혁씨가 추천 릴레이를 이어받아 다른 작가의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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