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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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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신작 ‘체인질링(changeling)’은 192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아이 바꿔치기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체인질링은 ‘마귀가 바꿔치기한 어린애’를 뜻한다. 중세 유럽에선 식탐이 심하거나 기형인 아이를 종종 악마의 자식으로 치부해 박해했다. 신동(神童)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중세인은 조물주가 정한 위계나 사회적 역할을 거스르는 걸 악마적 행위로 봤다. 이들에게 나이의 한계를 뛰어 넘은 어린 천재는 분명 경탄이 아닌 불신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18세기 중엽 모차르트의 등장은 신동에 대한 서구인의 시각을 크게 바꿨다. 네 살 때 피아노를 치고 다섯 살 때 첫 작곡을 한 이 천재는 유럽 궁정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편으론 “누군가 대신 작곡했을 것”이란 기성 음악인들의 조직적 모함에 시달렸다. 고통스러운 검증 끝에 그가 마침내 ‘모든 조숙한 재능을 재는 척도’(『천재의 역사』)로 자리 잡자 아류들이 등장했다. 뒤에는 대개 야심에 찬 부모가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외려 아이의 재능을 망쳤고 표절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1920년 스탠퍼드대의 루이스 터먼 교수는 지능지수가 150 이상인 아이 1500명을 대상으로 70여 년에 걸친 대조사를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연구 대상 중 특정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한 이는 없었다. 보스턴 칼리지의 엘렌 위너 교수는 “터먼이 학교 추천을 받은 ‘범생이’만을 연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타고난 지능 만들어지는 지능』)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도 “영재는 사회적 정상궤도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지난주 모 TV 퀴즈프로그램을 통해 또 한 명의 신통한 아이가 등장했다. 경북 고령에 사는 열한 살 소년이다. 국제관계에 대한 까다로운 문제를 맞혀 상금 4100만원의 ‘퀴즈영웅’이 됐다. 아이는 밥보다 책이 좋아 이제껏 3000권 넘게 읽었다고 한다. 학원엔 가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으로 궁금한 걸 찾는 놀이를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2006년 천재 연구를 집대성한 책 ‘전문 지식 및 전문가의 케임브리지 편람’을 펴냈다. 이 책 편집자인 앤더슨 에릭슨은 “천재를 만드는 건 1%의 영감, 70%의 땀, 29%의 좋은 환경”이라고 했다. 땀과 영감까진 모르겠으나, 어린 퀴즈영웅에게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덴 우리도 일조할 수 있다. 지나친 관심, 무리한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이다. 루소의 말처럼 “어린이들은 안에서 유년기가 무르익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며 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시간을 버는 것”이다.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