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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가 사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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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대 폐지 논의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는 국립대 공동학위제를 검토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국회에 진입한 민주노동당은 서울대를 비롯, 국립대의 평준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범국민교육연대는 오래 전부터 국.공립대 통합 선발을 주장하고 있다.

이쯤 되자 화급하게 된 것은 당사자인 서울대다. 총장이 직접 논쟁의 중단을 호소할 정도로 폐지론을 예사롭게 보지 않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제기된 폐지론에 귀를 닫고 있던 서울대가 각계의 의견 수렴을 통한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은 노무현 정권의 혁신 의지 때문이다. 오로지 충청권 득표를 위한 대통령 선거 공약이던 신행정 수도 건설이 눈덩이 구르듯 사실상의 천도로 이어지는 과정을 서울대 측은 주목하고 있다. 처음에는 행정기관만 옮기는 양하더니 입법부와 사법부 이전도 기정사실화하는 정부의 집요함과 무모함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새 수도에는 어차피 교육기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수도답게 최상위권 대학인 서울대가 자리잡으면 더욱 좋을 것이고, 국립이니 이전 결정과 예산 확보도 별반 어려울 것이 없는 데다 차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전을 통해 서울대를 폐지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지 않겠는가'.

대통령이 "구세력의 뿌리를 떠나서 새 세력이 국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천도가 필요했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서울대의 존립은 집권세력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구나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서울대를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신문에 크게 실리기 때문에 없애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피력한 바 있다. 총리 지명자도 교육부 장관 시절 서울대에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촉구한 적이 있다.

서울대 폐지론의 핵심은 고교 학생부 성적과 수능점수가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경쟁력 있는 인재로 양성하지 못하면서 최상위권 대학이라는 기득권을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권력을 독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대와 다른 국립대가 입시.교육.졸업에 이르기까지 통합 네트워크화한다면 더 많은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국내에서 쥐꼬리만한 국제경쟁력이라도 지니고 있는 대학은 그래도 서울대가 유일하다. 그런데도 고교평준화의 연장선상에서 대학의 하향 평준화를 시도하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서울대가 '최고'의 위상에서 '폐지'와 '평준화'의 대상으로 추락한 것은 전적으로 서울대 구성원의 안주(安住) 의식 때문이다. 남 부러울 것 없던 부잣집 자식이 갖은 세파에 시달리는 형국이다. 우월감과 자부심을 버리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밑바닥부터 확 뜯어고치는 획기적인 자기 개혁에 나서지 않고서는 서울대는 살 길을 찾기 힘들다.

무엇보다 자율적으로 책임 경영을 하는 독립법인화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인사와 예산의 편성.지원.집행, 학사운영을 정부의 통제와 관리에 따르다가는 끊임없이 통합과 폐지의 압력을 받기 십상이다. 세계화와 전문화의 시대에 무작정 백화점식 종합대학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학부대학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변신해야 한다. 음대.미대.사범대가 꼭 필요한지도 검토하고 법대.경영대.의대는 전문대학원으로의 개편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정원 감축에 단과대학이 반발하고 전문대학원 전환을 전제로 현행 정원을 유지하는 단견과 꼼수로는 폐지론의 파고와 격랑을 헤쳐나가기 어렵다. 빈대 잡으려 초가삼간 태우기보다는 아예 자진해 초가집을 헐고 현대식 건물을 올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도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