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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프로파일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0호 35면

영국 스코틀랜드 의대의 조셉 벨(1837~ 1911) 교수는 환자를 한 차례 힐끔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로열 스코틀랜드 연대에 오래 복무하다 퇴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죠? 특히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에 오래 근무했고, 커다란 관악기를 연주하는 군악대원이었죠?”

추정 근거는 뭘까. “방에 들어오자마자 차렷 자세를 취하더군요. 버클에 로열 스코틀랜드 연대 마크가 붙어 있고요. 얼굴과 목이 많이 탄 걸 보니 햇빛이 강한 지역에 근무한 것 같았는데, 문신을 보니 바베이도스에서 주로 하는 종류더군요. 보병으로 근무하기엔 키가 작아 군악대 출신으로 보였죠. 그리고 대형 관악기를 오래 연주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이한 흔적이 가슴에 보이더군요.”

환자의 대답을 들어 보자. “아뇨, 나는 북을 쳤는데요.”
악기 종류를 제외한 모든 추정은 정확했던 것이다. 벨은 범죄 수사에 과학적 추리를 적용한 선구자로 통한다. 제자였던 아서 코넌 도일이 만든 ‘셜록 홈스’ 캐릭터는 스승에게서 따온 것이다. 과학적 추리는 20세기 들어 심리학과 결합하면서 프로파일링, 즉 심리학적 추정이라는 기법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40~56년 미국 뉴욕 경찰은 전력 공급업체인 컨솔리데이티드 에디슨사를 응징하겠다며 시내 곳곳에 폭탄을 장치하고 일부는 터뜨리는 ‘미치광이 폭파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범죄심리학자인 제임스 브뤼셀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랫동안 범죄자들의 특성을 연구해 온 브뤼셀 박사는 범인이 신문사에 보낸 편지 내용과 문체·필체를 근거로 범인이 50대이고, 체격이 건장하고. 면도를 말끔하게 하는 편이고, 결혼하지 않은 채 혼자 살거나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 친척과 함께 살고 있을 것이고, 더블 정장을 입고 단추를 꼭꼭 채우고 있을 것이라는 내용까지 세세하게 추정했다. 경찰은 사촌 누나 두 명과 살고 있는 50대 남자를 찾아냈다. 수사관들이 동행을 요구하자 브뤼셀 박사의 예상대로 더블 정장을 입고 단추를 다 채운 뒤 나타났다. 미치광이 폭파범 조지 매트스키는 이렇게 잡혔다.

프로파일링 기법이 살인사건에 본격 사용된 것은 낯선 사람에 의한 이유 없는 범행이 늘어난 70년대 이후다. 50~60년대엔 범인의 대부분이 희생자 주변 인물이었다. 하지만 83년 미 연방수사국(FBI) 보고서는 그 전해에 발생했던 2만여 건의 살인사건 중 5000여 건이 전혀 모르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추산했다. 사건 해결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다.

프로파일링 연구개발에 앞장섰던 FBI 행동과학부는 83년 경찰 당국과 함께 흉악범죄 예방 프로그램(VICAP)을 제안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국립흉악범죄분석센터(NCAVC)를 세웠다. ‘묻지마 살인’에 과학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범 수사 과정을 보니 범인의 가면을 벗겨내고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가 기댈 곳은 과학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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