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전반기, 가만히 있는 게 패자로서의 도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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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10면

‘친박’이 드디어 움직이는가. 친박계 인사의 입각은 하마평으로 끝났다. 2일 한나라당 중진 의원들의 청와대 오찬 모임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8개월 만에 만난 것을 놓고도 뒷말이 무성하다. 박 전 대표가 “국민 공감대를 얻어 쟁점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청와대와 한나라당 지도부의 ‘속도전’에 제동을 건 것으로 해석됐다. 친박계가 공식 모임을 만든다는 소식도 들린다.

‘親朴’ 허태열 최고위원이 말하는 박근혜의 속내

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나라당 허태열(64·사진) 최고위원을 만났다. 허 위원은 부산 출신의 3선 의원(북-강서을)으로 유일한 친박계 최고위원이다. 최근에는 ‘친박 몫’으로 행정안전부 장관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고 2일 청와대 회동에도 참석했다. 허 위원에게 정가의 관심이 쏠린 이유다.

허 위원은 “이번 주에만 10개가 넘는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모두 거절했다”며 “중앙SUNDAY와의 인터뷰도 망설였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경제도 어려운데 계파 싸움만 하는 것으로 비치면 국민 보기에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인터뷰에 응했다. 솔직한 답변으로 세간의 오해를 풀고 싶다고 했다.

“친박이 법 통과 막은 적 있나”
-친이계와 친박계 사이에 갈등이 있는 건 사실 아닙니까.
“그렇다고 친이-친박이 싸웁니까. 친박 때문에 처리 안 된 법안이 있습니까. 표결 때 (친박도) 다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습니까. 국회 법안이나 나랏일, 대야 관계로 친박이 (당이나 청와대의) 발목 잡은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 의원 초청 오찬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2월 임시국회에서 쟁점 법안 처리를 친박이 도와줄 것이냐도 관심의 대상입니다.
“(친박이) 도와주는 것은 법안이 상정돼 표결할 때 찬성표를 던지는 거겠지요.”

-찬성표를 던질 의사가 있다는 뜻인가요.
“있다마다요. 신문·방송 겸영이라든지 기업의 방송 출자를 허용하는 미디어 관련 법안도 찬성합니다. 현행 방송법을 만들 당시엔 IPTV는 물론이고 케이블도, 인터넷도 없었잖습니까. 은행 출자도 안 열어주니까 외환은행이 론스타 같은 투기 자본한테 팔리게 된 거고…. 야당에서 ‘은행, 재벌 줄래?’라는 슬로건으로 국민을 현혹하는데 그럼 ‘은행, 외국인 줄래?’라고 되묻고 싶습니다.”

-박 전 대표가 청와대 회동 때 ‘국민 공감대 속 쟁점 법안 처리’를 강조한 게 2월
강행 처리는 곤란하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요.
“(답답하다는 듯) 전혀 아닙니다. 박 전 대표는 그런 생각이 아닙니다. 다만 절차와 방식에서 설익은 걸 가지고 밀어붙이면 안 된다는 거지요. 국민은 왜 쟁점 법안을 놓고 여야가 싸우는지 잘 모르지 않습니까. 심지어 국회의원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내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뒤 지역구로 돌아가 알리고 언론에 나가 토론도 하면서 국민의 공감대를 얻자는 겁니다.”

-친박 쪽에서도 쟁점 법안을 2월에 처리하는 데 찬성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 지도부와) 똑같은 생각이에요. 쟁점 법안들은 경제 살리기와 직결돼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우리 당이 만든 거니까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고치면 안 된다는 건 아니고 야당과 협의해야지요. 친박이 문제가 아니라 야당이 문제 아닙니까. 대기업 투자 비율을 20%에서 10%로 고치자, 이런 식으로 절충해 가면 되는데 야당은 아예 상정을 안 시키고 토론조차 안 하니까….”

-2월 처리를 하되 야당과 협의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연말 같은 폭력 국회가 있어서는 안 되죠. 법안의 큰 틀은 유지하되 세부 내용을 조절해 가면서 야당과 공감대를 확보해야 하고 그게 정 안 되면 국민 공감대라도 형성해야지 무조건 강행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게 박 전 대표께서 말씀하신 참뜻입니다.”

“타이틀도 없는 친박, 어떻게 나서나”
-박 전 대표나 친박계가 대통령과 당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나옵니다.
“허허…(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문제가 있다고 말할 때가 의견이 다른 거죠. 아무 말이 없는 것은 당에서 하는 일이 괜찮다, 좋다, 지지한다 이런 뜻 아닙니까. 그럼 박 전 대표가 매일 나와서 ‘이 건은 이렇습니다’ 말하고, 친박들 모아서 단체로 성명 내고 이러란 말입니까. 말이 없으면 그게 동의지, 때마다 ‘나도 의견이 같다’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초등학교 학생입니까. 그런 어린애 같은 걸 바란다는 것 자체가….”

-그런 태도를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죠.
“괜히 친박은 사보타주나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당 대표나 정책위의장 같은 분들이 다 친이계고, 우리는 그런 권한이 없으니까 그냥 지켜보는 방법 외에 더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젖혀 놓고 우리 친박이, 타이틀도 없는 사람들이 앞에 나서서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목소리 톤을 높이며) 그걸 방관자라고 하면…, 그럼 그쪽 당직을 우리에게 주든지.”

-친박계 의원들은 당직이 없어서 그렇다지만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의 큰 어른인데
당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박 전 대표가 정치적 위상은 높다 하더라도 당엔 엄연히 당직이 있습니다. 최고위원회의·중진회의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책임을 갖고 일하는 거죠. 그걸 무시한다면 공당(公黨)이 아니죠. 사당(私黨)이 되지 않겠어요. 자기가 영향력 있다고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면 그건 당이 아니죠.”

-박 전 대표가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는 게 부자연스럽습니다.
“박 전 대표는 생각이 참 깊으신 것 같아요. 경선과 대선이 끝나고 향후 행보를 놓고 우리 내부에서도 격론이 있었죠. 그런데 박 전 대표께서 정리를 하셨어요. 이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실현할 수 있도록 소신껏 국정을 펼 기회를 줘야 한다고. 정권 전반기에는 우리가 왜 패했는지 반성하고 미래를 고뇌하면서 가만히 있는 게 패자로서 이 대통령과 국민에게 도리라는 겁니다. 박 전 대표도 이 대통령이 잘 돼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늘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2월 들어 ‘조용한 행보’가 바뀌는 것 같습니다.
“2월 국회가 끝나면 시시비비하겠다, 계파 모임도 만들겠다 이런 얘기들이 나오니까 엄청난 변화다, 친박 기조가 바뀐 것 아니냐 말들이 많죠. 하지만 박 전 대표께서 4일 기자들에게 (김무성 의원) 개인 의견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하셨잖아요.”

-그 이후로 변화는 없습니까.
“끝난 거죠. 박 전 대표 뜻이 분명하니까. 그 이후론 (계파 모임 공식화) 얘기가 전혀 없습니다. (박 전 대표께서) 처음 말씀하셨던 것처럼 내년 상반기까지는 지금처럼 조용히 갈 겁니다.”

-공식 계파 모임은 없어도 친박 의원들끼리 만나 입장을 정리하지 않나요.
“(고개를 저으며) 한번도, 네버(never). 박 전 대표께서 ‘서클(공식 계파 모임)’ 같은 거 만들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사안마다 일일이 물어보지도 못하고 각자 알아서 하는데 박 전 대표의 평소 소신을 헤아려 결정합니다. 어떻게 보면 짝사랑이지, 지독한 짝사랑.”

“둘 간격 아직 좁혀지지 않아”
-‘친박 기용론’도 끊임없이 나왔잖습니까. 허 의원도 행안부 장관 하마평에 올랐죠.
“구체적인 제의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인사권자와 관계없이 일부 사람들 생각이었겠죠. 또 장관 한 명 간다고 해서 (친박이) 내각에서 무슨 역할을 하겠어요.”

-박 전 대표가 반대해 무산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것에 대해선 언급하지도, 물어보지도, 의견 표시도 안 하는 분입니다. 제의받은 게 없으니 저도 물어본 적 없고.”

-2일 청와대 회동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분위기 좋~았죠. 비록 무리 속에서 만난 거지만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악수하고 인사하고, 생일 노래도 대통령께서 부르시고. 그 이상 좋은 분위기가 어디 있어요.”

-박 전 대표 발언이 논란을 낳았는데요.
“(대통령께서) 마무리 발언을 하라고 하시니까. 사실 (박 전 대표가) 덕담을 한참 하셨거든요. 이 어려운 시기에 정말 애쓰신다고. 하지만 대권을 생각하는 사람이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발언을 할 순 없는 것 아니오. 마지막엔 대통령께서 박 전 대표 소매를 살짝 당기시듯 함께 창가로 가셔서 2~3분 대화도 나누셨는데 보기 좋은 거 아닙니까.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고 긍정적으로 보는 게 좋죠.”

-이 대통령도 SBS 원탁대화에서 박 전 대표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했는데.
“(주저하며) 그거 뭐…, 좋은 말씀이죠.”

-두 분 사이가 정말 괜찮습니까.
“두 분 사이에 여러 간극이 있는 게 좁혀졌다고 보기는 어렵죠. 신뢰가 깨져 있는 게 아닌가, 공천 파동이나 복당 문제나…. 박 전 대표가 볼 때 이 대통령이 하는 말에 믿음이 간다, 이젠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해도 되겠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이런 신뢰관계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계파 갈등의 책임이 대통령이나 친이계에 더 많다는 겁니까.
“대선 후보도 경선으로 뽑는데 계파가 생기는 것 자체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계파 간 경계를 흐릿하게 하려면 권력과 책임을 가진 쪽에서 먼저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주류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죠.”

-친박이 당직이나 내각에 여러 명 진출하면 갈등이 해소될까요.
“제일 중요한 건 상부 구조죠.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관계가 친밀해져야죠. 그게 선결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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