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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일본 금융빅뱅에 한국도 태풍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2003년 서울 A그룹 자금관리실. 자동차공장 증설에 필요한 10억달러 조달을 위해 고위 경영진이 모여 앉았다.

"수수료도 싸고 연3%로 금리도 낮은 도쿄 (東京) 시장이 현재 가장 유리하다" 는 실무자들의 의견에 따라 A그룹은 즉시 도쿄본사에 채권발행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채권발행에 따른 세금은 고스란히 일본 국세청에 들어갔고 수수료는 일본 시중은행이 받아 챙겼다.

같은해 정년퇴직한 B씨와 동료 C씨는 퇴직금을 굴리기 위해 함께 외국계 은행을 찾았다.

"호주달러화 예금을 드시죠. " 창구직원은 경상수지 적자에 따른 원화의 평가절하추세와 연7%의 이자율을 감안하면 국내정기예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권유했다.

B씨의 퇴직금 1억원은 곧바로 한국땅을 떠났다.

장기투자를 선호하는 C씨는 이 은행을 통해 도쿄시장에서 금보다 더 안전하다는 미국 정부국채를 매입했다.

산업공동화보다 더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는 자본공동화 현상. 보다 자유롭고 높은 이익을 좇아 흘러다니는 자본의 이동은 국경이라는 물리적 벽을 둘러쳐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한층 작아진 파이를 놓고 싸우는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그럴수록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자본의 해외도피는 가속화하는 악순환…. 2001년 완료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일본의 금융빅뱅은 한국에 자본공동화냐, 개혁을 통해 살아남느냐라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당장 내년부터 자유금융도시 홍콩.싱가포르에 이어 도쿄와 서울이 금융빅뱅에 들어가면서 아시아 금융시장은 국제화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금융빅뱅이 단순한 규제철폐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금융국경 철폐로 이어지는 것이다.

도쿄 금융빅뱅은 한.일 금융시장과 금융기관 사이의 경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신한은행 홍창홍 (洪昌弘) 도쿄지점장은 양국간의 금리격차를 우려했다.

洪지점장은 "12%에 달하는 한국의 실세금리를 하루빨리 국제수준인 5~7%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금융기관의 무더기 도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 말했다.

아무리 애국심에 호소해도 기업들이 금리가 싼 도쿄시장으로 자금줄을 옮길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금융시장의 규모에서도 일본쪽이 단연 앞선다.

지난해말 현재 일본의 개인금융자산은 1천2백조엔. 일본경제연구센터는 2020년에는 그 규모가 2배이상 (2천5백조엔) 늘어나고 주식과 투자신탁에 대한 투자비중이 33% (현재는 12%) 로 높아져 더 효율적이고 공격적인 투자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한국 개인금융자산은 일본의 5%가 안되는 5백55조2천억원. 이중 예금비중이 57%에 이르지만 전체 시중은행을 합해도 도쿄미쓰비시 (東京三菱) 은행 하나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은행 유원정 (柳元楨) 도쿄사무소장은 "경영기법에서도 일본에 크게 뒤져 있어 국내 금융기관끼리 흡수합병과 전문화 없이는 국제경쟁시대에 버틸 수 없다" 고 우려했다.

그러나 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일본 금융기관들의 체질개선과 경쟁력의 급속한 향상이다.

종합상사 이토추 (伊藤忠) 는 내년 4월부터 은행들과의 외환거래를 중단한다고 이미 통보했다.

마루베니 (丸紅) 는 도쿄.뉴욕.런던.싱가포르에 아예 사내 외환거래은행을 설립, 자체적인 외환거래를 통해 연간 외환 수수료 4억엔을 절약하기로 했다.

연간 30조~40조엔에 이르는 종합상사들의 외환결제를 취급하면서 상당한 떡고물을 챙겨온 일본 금융기관들은 새로운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내년 4월부터 시행되는 조기시정조치도 일본 금융기관들을 경쟁으로 내몰기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자기자본비율이 국내기준으로 4%, 국제결제은행기준으로 8%에 못미칠 경우 '조기' 에 적발해 파산시켜버리겠다는 것이다.

대장성은 금융빅뱅 과정에서 전체 금융기관중 30%정도가 도태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개발은행 다키구치 가쓰유키 (瀧口勝行) 연구소장은 "일본 금융빅뱅이 한국에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국제화시대에 빅뱅을 늦출수록 그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 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보다 빨리, 더 근본적인 금융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은 영국의 빅뱅이 주변국에 미친 영향에서도 알 수 있다.

금융빅뱅 이후 지난 10년동안 런던 주식시장은 7배 이상 커진 반면 주변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주식시장은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했다.

자유롭고 거대한 금융시장을 가진 큰 나무 옆에서 작은 나무들이 자라기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이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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