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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서울 최초의 날 24일부터 예술의 전당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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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중앙일보는 KBS와 공동으로 국내 최초로 '폼페이 최후의 날 유물전' 을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7월24일부터 9월3일까지 개최한다. 어느날 갑자기 화산재 밑에 파뭍힌 폼페이는 헬레니즘문화의 정수가 잠들어있는 곳. 국내에 최초로 공개되는 폼페이유물전에 앞서 폼페이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그 최후의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매년 여름 유럽의 바캉스철이 시작되면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고대도시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관광객들이 이탈리아 입국 심사대에

줄을 잇는다. 이탈리아 캄파니아지방의 나폴리만(灣)동쪽

산자락에 펼쳐있는 고대도시 폼페이가'고대에의 향수와 낭만'을 찾아가는 이들 관광 순례자들의 최종 목적지다.

인근 베수비오화산의 돌연한 폭발로 반나절과 하룻밤 사이에 깊이 6의 땅속에 파묻혀버린 폼페이는 기원(紀元)을 전후해 로마를 중심으로 꽃피웠던 헬레니즘 문화의 타입캡슐이나 다름없다.

사랑과 질투,욕망과 관용 그리고 희망과 좌절. 고대인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느끼고 누렸던

모든 삶의 편린들이 어느 일순간의,

아무도 예상치못한 대자연의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변화에 의해 박제처럼 1천9백년간 잠든채 전해져오는 곳이 폼페이다.

'억수같은 불비가 그칠줄 모르고 쏟아져내리고 때로는 발밑에서 땅이 흔들렸는데 먼곳에서 해일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너무나 엄청난 재앙으로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듯 공포에 휩싸였다.

발이 휘청거리고 미끄러져서 나동그라지기가 일쑤였고 평지에도 수레를 세워둘수

없을 정도였다.

번개처럼 허공을 찢어놓는 화산의 불빛 때문에 하늘의 구름은 괴수나 무시무시한 짐승처럼 보였다. 겁에 질려 갈팡질팡하는 시민들의

눈에는 마치 그것이 폼페이에 재앙을 내리는

거인의 거대한 손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불위 리턴은 소설가의 상상력과 로마시대의 문헌을 짜맞춰 소설“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이같이 그날의 아비규환의 참상을 묘사했다.

기원후 79년 8월24일 정오무렵.

바다를 낀 상업으로 부유했던 휴양도시 폼페이는 신(神)조차 외면한 것과 같은 절망스런 최후의 날을 맞닥뜨리게 됐다.

잠자고 있는줄 알았던 베수비오산이 그때까지 마개 역할을 했던 산 정상의 두꺼운 바위층을 뚫고 일시에 용암과 불길을 내쏟으며 8백년만에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정오 무렵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된

용암분출과 억수같이 쏟아지는 화산재와

화산폭발에 동반한 지진으로 베수비오산 산자락에 펼쳐있던 아름다운 폼페이는 지구상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다만 높은 건물의 꼭대기만

지표위에 남긴채 얕게는 5,깊게는 7의 용암.화산재.진흙속에 파묻혔다.

이날의 참극으로 희생된 폼페이사람들은 시민.귀족 1만2천명에 노예 8천명. 하루밤 사이에 지상에서 그 자취를 감췄지만 폼페이는 발굴이란 회생노력을 통해 지금도 그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폼페이란 지명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BC310년.당시 심니움족들의 지배아래 있던 이곳을 확보키위해 로마군은 대함대를 보냈으나 패배했다고 로마의 역사서에 기록돼있다.

폼페이의 역사는 폼페이 벽화에 나타난 화풍(畵風)상의 변화로 따져보면 그이전에

약 4백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세 들어서의 발굴에 따르면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폼페이의 최후보다 무려 1천년이 앞선다.

선사에서부터 대폭발까지의 1천년의 평화로운 번영의 역사,그후 18세기초 발굴의 첫삽이 떠지기까지 1천7백년간의 길고 긴 휴면기(休眠期) 그리고 발굴이후 현재까지 2백50년에 고대유적도시로서의 역사가 폼페이에는 담겨있다. 15세기말 이일대로부터 나폴리만까지 지하수를 끌어오려던 건축가에 의해 폼페이유적의 일부가 알려지면서 폼페이에의 꿈이 시작된다.그러나 당시 이 건축가는 이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뒤 1710년,농부 한사람이 우물을 파다 우연히 금붙이장식을 발견한게 폼페이의 본격적인 발굴로 이어졌다.그가 판 곳은 시내 중심가 에르콜라노 극장이 있던 곳이었다.이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이지방 귀족이 농부를 설득,이일대를 사들여 땅속을 보물을 찾기에 나섰다.

보물찾기가 몇차례 성공하면서 폼페이일대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떠돌이,호기심많은 학자,고대보물에 흥미가 있는 귀족.왕족들이 앞을 다퉈 몰려들었다.

이 와중에 폼페이라는 글귀가 적힌 비석이 발굴된 것은 1763년. 역사속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도시가 땅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유럽의 문화인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폼페이붐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웬만한 유럽의 상류층 살롱은 폼페이 유물로 장식됐고 귀족들은 그곳에서 폼페이의 벽화를 감상했다.프러시아의 뛰어난 예술사학자 요아힘 빙켈만은 이런 모습을 보고 직접 현지로 달려가 고대도시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기며 한편으로 부분별하게 파헤치는 인간의 탐욕에 한숨지은 것을 그의 서한집에 생생하게 남겨놓고 있다.

폼페이 발굴이 새 전기를 맞은 것은 이탈리아의 통일이 계기.마구잡이 발굴을 막기 위해

통일이탈리아 왕국은 1860년 젊은 고전(古錢)연구가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발굴시대가 폼페이에 열리게 됐다.

주세페 피오렐리의 가장 큰 업적은 서울 잠실야구장 15개크기의 폼페이 시가지를 9개 구역으로 나누고 집집마다 고유번호를 매겨 체계적인 발굴의 기틀을 마련한 것.

그에 의해 도시의 전체모습이 드러난 폼페이는 동서로 길게 누운 계란형 도시였다.

나폴리만과 이어진 서쪽지역에 중앙대광장.바실리카.아폴로신전등 공공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끝에는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원형경기장이 자리잡고 있다.

폼페이가 고전연구가는 물론 관광객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은 생생한 고대인의 삶이 그대로 정지된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 느 집에서는 점심상을 차리다만듯 상위에 샐러드.과일.과자 그리고 반쯤 껍질이 벗겨진 삶은 달걀이 그대로 올려진채 발굴되어 일상의 삶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좋은 예가 됐다.

또 거리의 어느 모퉁이에는“리투스,당신은 2류인간이다.리투스,너는 한푼의 가치도 없어”라는 낙서가 적혀있어 폼페이인들의 살아있는 듯한 감정의 단편까지 전하고있다.

폼페이문화의 핵심은 상업도시라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아 로마식의 강건함과 화려함을 더한 핼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내고 꽃피웠다는데 있다.

실제 18~19세기에는 많은 미술가.건축가.도예가 심지어 가구제조업자까지 이곳을 방문해 고대문화의 영감을 이어받으려 노력했었다.이런 노력은 유럽의 문화에도 당장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퐁텐블로궁전의 방들을 꾸미면서 폼페이의 건축과 장식양식을 모방했다. 퐁텐블로궁의 폼페이양식은 일시적으로 유럽에 유행하며 로코코양식을 대신해서 신고전주의양식으로 유럽의 장식미술 스타일을 변모시키는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근래들어 이탈리아 당국은 매년 1백만명 넘게 폼페이를 찾는 관광객을 놓고 유물을 계속 관광객들에게 공개할 것인가 아니면 안전한 보존에 힘써야 할것인가의 고민에 빠져있다.

중앙일보와 KBS가 공동주최하는“폼페이최후의 날전”은 보존에 우선을 두려는 이탈리아 당국이 아시아국가에는 드물게 유물을 대여해줘 열리게 된 전시다.

국내에 소개될 폼페이유물은 벽화와 모자이크,조각,보석,갑옷,장식용세공품등 1백50점이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사진설명>

사티로스의 겁탈을 표현한 대리석상. 목욕탕 주변에 놓아 물속에 관능적인 그림자가 비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다. 왼쪽은 벽화와 함께 폼페이를 대표하는 회화장르인 모자이크. 귀족들은 침실바닥에 이런 그림을 장식해 부부간의 은밀한 사랑에 걸맞는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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