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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월드에서 리플 달다 찾아왔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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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경제연구소 내부 모습. 오른쪽은 인터넷 홈페이지.

이코노미스트2008년 5월 중순 삼성생명 서초타워 28층 삼성경제연구소. 짧은 머리에 턱수염이 수북한 백인 노신사가 들어섰다. 연구소 글로벌 부문을 총괄하는 김경원 전무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노신사도 서툰 한국어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며 손을 맞잡았다.

영문 홈페이지서 보고서 전문 번역하면서 인기 끌어 #영국 북한 전문학자가 삼성경제연구소 찾은 까닭은?

이 영국 노신사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명성이 높은 에이던 포스터카터(61) 영국 리즈 대학 교수. 그는 한국현대사를 가르치고 북한 문제에 특히 정통해 뉴욕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 독일의 유력지 디 벨트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포스터카터 교수는 특히 6자회담과 관련해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를 꾸짖고 북한의 벼랑끝 전술을 질책하는 등 비교적 객관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와병설이 돌았을 때도 영국 BBC가 사진 조작 의혹을 보도하며 “북한은 김일성의 건강 이상설이 돌 때 그가 백두산에 오르는 사진을 합성해 조작한 전례가 있다”는 포스터카터 교수의 발언을 비중 있게 다뤘다.

해외서 가입한 회원만 1만 명

2004년에는 한국의 386세대를 겨냥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이념만 내세우지 실제 행동은 너무 복고적이고 국수적”이라고 발언해 논란의 중심에 섰고,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중간평가를 받겠다며 국민투표를 제안하자 파이낸셜타임스에 ‘떠나려면 지금 떠나라’는 칼럼을 기고한 적도 있다.

역사·정치학자로서 한국 현대사에 깊이 관여해 온 그가 왜 민간 경제연구소를 찾았을까. 노(老)교수가 삼성경제연구소를 찾은 이유는 홈페이지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기존 영문 홈페이지를 확대 개편해 2004년 서비스를 시작한 영문 사이트 ‘세리월드(www.seriworld.org)’가 포스터카터 교수와 연구소를 이어준 것.

2007년 세리월드가 보고서 내용 전체를 영문 번역해 게재하면서 해외 회원 수가 크게 늘어 현재 전체 회원 5만5000명 가운데 해외 가입자가 1만 명이다. 포스터카터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그와 연구소의 인연은 2007년 5월 임영모 연구원이 작성한 ‘새롭게 주목 받는 기계산업’ 보고서에 포스터카터 교수가 댓글을 달면서 시작됐다.

그는 댓글에서 “세리월드는 내 한반도 문제 연구에 꼭 필요한 존재”라며 말미에 “Taedanhi komapsumnida”라고 덧붙였다. 이후에도 임수호 연구원이 2007년 11월 작성한 ‘정상회담 이후 남북경협의 방향’, 동용승 연구원의 ‘5년 후의 북한 경제’ 보고서에도 댓글을 달았고 지난해 방한 기회가 생기자 SERI를 직접 보고 싶다는 의사를 먼저 전해 왔다.

세리월드가 한국에 관심 있는 외국인들에게 등대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은 영문 콘텐트의 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일부 보고서를 발췌해 번역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지난해부터 전문을 번역하면서 반응이 크게 좋아졌다는 게 자체분석이다. 일부 이용자는 정부가 제공하는 영문 정보들이 부처별로 업데이트가 늦거나 뉘앙스가 다른 단어로 오역하는 경우가 잦아 신뢰가 떨어진 점도 세리월드가 인기를 끄는 데 한몫했다고 말한다.

번역 작업을 내부 인력이 담당하면서 영어로 읽는 맛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이옥정 에디터가 맡고 있는 번역팀은 외국인 3명을 포함해 총 9명으로 구성돼 있다. 김경원 전무는 영문으로 번역된 보고서를 모두 직접 챙긴다. 김 전무는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데도 세계적 인지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해 영문 홈페이지 세리월드를 강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 서비스도 반응이 좋다”고 덧붙였다. 영문 보고서들이 회자하자 외신기자들도 ‘세리월드 마와리(순찰의 일본어 표기)’를 돌기 시작했다. 에반 람스타드 월스트리트저널 한국 특파원은 “세리월드를 방문해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살펴보고 있다”며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전에 작성한 기사에서는 이를 인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처 출입기자들이 공무원과 함께 외신이 기자간담회 등 공식 일정에 참가하는 것을 막아섰기 때문에 민간경제연구소 자료가 귀해졌다는 입장이다. 미국에도 출입기자 제도는 있다. 뉴욕시의 경우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실에서 별도로 출입기자단(press pool)을 운영한다. 시장의 일정을 하루 전에 기자단에 알리고 어디서 얼마 동안 기자간담회를 갖는지도 알려준다. 기자단 소속이 아니면 알 수 없다.

연구원 출연 동영상 깜짝 인기

다만 기자단 가입여부를 기자들이 정하지 않고 시장실에서 정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뉴욕 시정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느냐가 유일한 가입기준이다. 한국 기자라도 정기적으로 뉴욕 시정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가입할 수 있다. 세리월드 보고서를 즐겨 읽던 애독자가 연구소를 방문하는 일도 많다.

2007년에도 IMF 수석연구원들이 연구소를 찾아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원부터 찾았고 태국 등 아시아에서 학자들도 찾았다. 지난해 하반기 들어 삼성경제연구소를 직접 찾는 해외 학자와 관료 수는 더 늘었다. 7월에 대만정치대학 핑더후앙 교수와 MBA 과정 학생들이 견학을 왔고, 11월에는 프랑스 기업과 혁신 국립재단 측에서 견학을 왔다.

12월에도 프랑스 일간 르몽드 기자가 세리월드에 게재된 복득규 박사 보고서를 보고 연구소로 직접 찾아와 인터뷰를 해 갔다. 월스트리트저널, 파이낸셜타임스, 르몽드 등 해외 유력 언론이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보고서가 외신에 인용되는 빈도도 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10~12월 주요 외신기사에 모두 25차례나 등장했다.

세리월드의 콘텐트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보고서는 매주 발행되는 코리아 이코노믹 트렌드(Korea Economic Trends·KET). 외국계 회사 CEO, 주한 외교관들, 외신기자들에게 한정 배포했지만 세리월드를 시작하면서 온라인에서도 서비스하고 있다. KET는 주간 평균 조회 수가 1만3000여 건에 달한다.

예상외로 인기를 끌고 있는 콘텐트는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원이 직접 출연하는 5~7분가량의 동영상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 동영상 제작을 위해 사무실 한편에 스튜디오를 직접 운영한다.

민간연구소 자료 귀해진 건 정부·기자단 결탁 때문

인터뷰 에반 람스타드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

2006년 한국에 온 에반 람스타드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은 “삼성경제연구소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민간경제연구소 자료는 무척 귀중하다”며 “문제는 한국 정부가 기자간담회에 외신을 부르지 않는 일이 간혹 있다는 것이고, 이는 출입기자단(press club) 소속 한국 기자들이 우리와 경쟁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민간경제연구소가 외신에 정부를 대체할 정보 창구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보나.
“매우 유용하지만 민간경제연구소도 데이터 수집은 정부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 정부가 기자간담회를 열면서 외신을 아예 배제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항상 한국 언론이 보도한 내용만 뒤쫓게 된다. 한국 기자들이 우리와의 경쟁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기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공무원들은 한국 기자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정부가 외신 보도를 반박하는 일이 잦아 마찰이 있었다. 외신이 출입기자단에 합류한다면 그런 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보나.
“출입기자단은 정부나 기업 입장에서는 기자들과 정보공개 범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제도다. 마찬가지로 기자들도 모두 똑같은 정보를 받기 때문에 직장 상사와 문제가 생길 리 없는 거다. 한국 언론이 외신 보도를 비판하는 것은 경쟁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 한국 정부와 마찰을 빚었던 경험이 있나.
“내가 올 들어 쓴 기사는 한국은행이 금리를 낮췄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국경제는 성장세가 둔화되긴 했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올해는 경제상황이 더 안 좋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제는 1997~98년 경제위기를 극복했던 기간보다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 회복될 것이라고 본다.”

한정연 기자 jay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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