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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그래,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을 지니고

세상의 이치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는

여자를 만나면 만사 제쳐두고 너에게 신고부터 하마.그때를 대비해서 포상금이나 넉넉히 준비해 둬라.” 농스럽게 말하고 나서 나는 남겨진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근데,형은 정말 하영씨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요?”“갑자기 하영이 얘기는 왜 꺼내?”

빈 커피잔을 손에 들고 나는 그를 보았다.

“가끔은 형의 속내를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요즘 세상에 그렇게

정성스런 여자를 만나기도 어려운데 고집스럽게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다구요.내가 대상에게

함몰해 버리는 타입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때때로 형이 아주 냉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거죠 .”“너,오후에 뭐할 거냐?”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나는 그만 일어나자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흠,전형적인 응전 방식이로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에 그는 오후에 뭘 할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어는 쪽에서건 인생을 걸 만한 일이 생기면 서로 연락하자는 말을 덧붙이고 나서 그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혼자 사는 남자들에게 인생을 걸 만한 일이란,다소 한심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전적으로 여성을 염두에 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대감을 의미하는 말이었다.단적으로 말하자면,이성을 향해 24시간 입을 벌리고 있는 짝 없는 인간들의 정신적 허기 같은 것. …나른한 오후네요.전화 주실래요? 오기욱과 헤어져 15층으로 올라오자 자동응답기에 윤하영의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그것을 듣고 나서 나는 잠시 애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나른하니까 전화를 걸어달라? 용건을 그런 식으로 해독하자 웬지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다.심심찮게 만나서 저녁식사도 함께 하고,술도 마시고,가끔은 잠도 같이 자는 사이이니 전화 한 통화를 놓고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사이는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내가 나른함까지 해소시켜 주는 크리너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인간에게는 어는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처리 불능의 영역이 있게 마련이고,그런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오직 시간뿐이라는 것 정도는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우리가 흔히 말하는'피곤하고 짜증스런 존재'란 바로 그런 걸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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