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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장면인가 현실인가' 공포物의 흐름이 달라진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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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귀신 이야기는 허구다.어쩌면 그것은 공포 소비자들의 믿음인지도 모른다.만일 그 약속이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허구의 경계선을 벗어나고 있는 귀신 이야기의 자극에 솔깃하지만-.돌아서서 생각하면 그게 아니다.뭘까.

#1 가상이 현실로 바뀌었을 때-러시아의 어느 겨울.텅빈 영화 촬영세트 구석에서 스태프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남녀배우가 한창 뜨거운 성애 장면을 연출중이다.얼핏 흔한 포르노 영화를 연상케 한다.이어 정사중 살인장면 촬영으로 이어진다.여배우가 각본대로 자세를 고쳐 잡는다.

“조심해서 찔러야 돼.”감독은 속임수로 말 한마디를 던진다.들었는지 말았는지 남자배우는 태연하다.

급기야 감독의“고!”사인-.아니,이건 연기가 아니다.비명소리가 유난히 실감나는가 했더니'진짜'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여자는 혼란속에서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죽어간다.본인만 모르고 있었던 끔찍한 각본대로 말이다.

그들이 촬영하고 있는 영화는 바로'스너프 필름'(실제로 살인하면서 찍는 포르노 영화)이다.이는 95년 칸영화제 스릴러 부문 출시작'무언의 목격자'의 한 장면으로 삽입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러시아 마피아는 스너프를 찍어 암거래로 전세계에 유통시키기도 했다.

이 영화는'가상세계의 위협에 대해 현실은 과연 안전한가'를 되묻게 한다.스릴러물의 기본 약속은'현실은 현실,허구는 허구'아닌가. 공포체험자가 온몸이 조여드는 두려움에

휩싸이면서도 애써 눈을 부릅뜬 채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키는 것은 그 상황이 현실에서 재현될 리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2 가상과 공포 사이-아내에게 매맞고

인간적 멸시를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견디는 이무기씨.그는 내연의 처와 공모해 아내를 살해하기로 작정한다.어느 비오는 날 드디어 아내살해 음모는 실현된다.“당신에 대해 무기씨한테서 잘 들었어요.”내연의 처가 죽어가는 전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그러나 곧 새 아내도 전처처럼 그를 구타하기 시작한다.어느 비오는 날.다시 첫 장면의 재연이다.칼을 든 남편 앞에 엎드려 비는 아내 뒤로 또 다른 새 여인이 서있다.“당신에 대해 무기씨한테 잘 들었어요.” 만화가 이상세씨의'공포 에센스'의 한 장면이다.이씨는“영화'오멘'의 음산한 분위기를 연상하며 작품을 구상했다”고 말한다.귀신이 나오는 야담류와 차별화된 이씨의 작품에는 악마적 인간상과 환상이 가득하다.

'공포 에센스'는 지난 2월 단행본으로 출간돼 초판 2만부가 매진됐고 재판을 찍는 중이다.단행본일 경우 3만~4만부 수준이 만화계 베스트셀러인 현실에 비춰보면 이 책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공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일견 모순투성이다.실제 위험에 노출되는데는

두려움을 가지면서도 가상의 공포체험엔 열심이다.왜일까. 이는 공포물

그 자체의 존재방식과 관계된다.

사람들이 공포체험을 통해'괴롭힘을 당하러'찾아다니는 것은 우선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이에 대해 영화'퇴마록'의 기획자 김익상씨는“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을 느끼면 곧 현실을 파괴하고 싶은 상상과 욕망이 생기게 마련”이라며,“그 욕망은 공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충족되고 이는 곧 체험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고 말한다.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계기는 여기서 비롯된다.공포물은 보다 현실적일수록 더 실감나게 마련이니까.

#3 현실이 진짜 공포-서울시민은 무시로

지하철을 타고 한강에 가로놓인 다리를 건넌다.갑자기 표정이 굳는다.'혹시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터널이 붕괴한다면….'야릇한 갈등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일시 흔들린다.굳이'불안하다 65%'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들이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영화전문 케이블TV 캐치원에서 마케팅을 맡고 있는 송혁씨의 반문부터 옮기자.

“'꽃잎'같은 영화가 정말 공포영화라고 생각한다.국가권력이 자기통제력을 잃었을 때야말로 공포상황 아닌가.”또 그의 시각으로 볼 때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지는 현실이야말로 공포 그 자체다.이것이 최근'공포물의 현실화'라는 새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이런 변화의 조류는 대중매체에까지 수용된다.

TV를 보자.SBS'토요 미스터리'와 MBC'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는'전설의 고향'류의 귀신 이야기와 뚜렷이 구별된다.한국적 정한(情恨)에 사무친 귀신 이야기를 주종목으로 삼는 기존 공포물은 아무리 무서워도 깨고나면 그만인 악몽처럼 '현실과 별개'라는 공식에 충실하다.

그러나 두 방송사의 귀신 이야기는 더 이상 허구의 경계선 안쪽에 머무르지 않는다.'언제라도 내 앞에 현실화될 수 있는 공포'쯤 될까.

그러나 현실과 가상의 벽을 허무는

새'공포 창조'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극단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공포물의 성격상 자칫 체험자들이 현실의 공포와 가공의 공포를 분간하지 못하고

이를 실제 상황으로 여기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에게 그 혼란은 더할지 모른다.

아무리'장르 넘나들기'가 유행이라지만 삶과 죽음을 오가는 일에도 실험이 허용될까.천만의 말씀이다. 정용환 기자

<사진설명>

한계효용은 체감한다.그래서 자극은 도를 더해가기 마련이다.어디까지 가는 걸까.공포영화의 가상상황이 현실로 닥친다면-.그 끔찍한 공간에서도 우리는 무감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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