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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말.용.범띠 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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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현대의학의 관점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조선조 말까지만 해도 임신 3개월 이전이면 성별이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약이나 방술(方術)로 태아를 남자가 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가령 도끼를 임신부 몰래 침상 밑에 숨겨 둔다거나,남편의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임신부의 침상 밑에 숨겨둔다거나 하는 따위의 미신적인 방법들이다.물론 전통적인 남아선호사상이 빚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다.

말띠나 용띠 혹은 범띠 여아는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도 따지고 보면 가급적 여아 출산을 기피하려 했던 심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한데 말띠,그중에서도 백말띠의 여성이 평생 액운을 타고 난다는 속설은 본래 일본에서 비롯된 풍습인데도 우리의 남아선호 사상과 엇물려 말띠 딸은 낳지 않겠다는 풍조가 널리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는 백말띠 해였던 병오(丙午.1966)년 딸을 낳아서는 안된다는 큰 소동이 벌어진 끝에 그해 출산율이 크게 떨어졌다.그해 태어난 다수의 여성들이 20여년 후인 80년대 후반 결혼하는데 애를 먹었던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백말띠 여성들의 팔자가 드세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입증했다고나 할까. 말띠 여성의 팔자가 드세다는 것이 우리 풍습이 아니며,단순한 속설임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한 민속학자는 얼마전 조선조 역대 왕비의 띠를 조사한 일이 있었다.그 결과 성종.인조.효종.현종.고종 등 다섯 왕의 부인이 말띠임을 밝혀냈다.말띠의 팔자가 드세다면 사주팔자를 그토록 중시했던 시절에 말띠 여성을 왕비로 택했겠느냐는 것이 그 학자의 결론이었다.

아직도 소위'사주팔자'에 매달리는 사람들은“좋다는 일도 다 못하고 사는 세상에 하필이면 나쁘다는 일을 하겠느냐”고 항변할 법하지만 말띠.용띠.범띠 여아를 기피하는 풍조가 남아선호사상과 관련돼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통계청의'통계로 본 여성의 삶'에 따르면 말띠해(90년).용띠해(88년).범띠해(86년)의 남녀 출생 성비(性比)는 85~95년의 평균에 비해 남아가 월등히 높았다고 한다.이런 풍조가 확산되면 일본의 경우처럼 특정 띠를 가진 여성의 혼사길이 순탄치 않아'팔자가 드세다'는 속설을 역(逆)으로 입증할 터인즉 이래 저래 여성들의 삶은 고달프게 마련인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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