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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가장위기의가정>4. 脫가부장 시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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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지난해 명예퇴직을 하고 올 연초부터 조그만 식당을 시작한 林모(51)사장은 직장을 다닐 때보다 한결 느긋하다. 갑작스런 퇴직에 가족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부였던 아내도 식당일을 같이하며 예전보다 신이 난 것 같아요.물론 식당일이 힘들겠지만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고 좋아하더군요.대학에 다니는 아이들도 용돈은 알아서 벌겠다고 합니다. 나만 바라보던 가족들이 갑자기 스스로 살 궁리를 하는 셈이지요. 처음에는 내가 무능하니까 가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아내나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됐지요”林사장의 말이다.

그러나 林사장 가정처럼 가장 중심의 구조에서 탈피해 서로 돕는 상황이 되려면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우선 여성의 고용여건이 지금보다 개선돼야한다.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이 취업을 잘 못하는 이유로 ▶가사.육아부담(52.5%) ▶사회적 편견(24.7%) ▶승진등 근로여건(9.5%)의 순이었다.

얼마전 대구지하철공사가 역무직을 채용하면서 여성을 뽑지 않아 문제가 된일이 있다.역무직을 2교대로 근무시키고 있는데 여성을 뽑을 경우 근로기준법에 따라 3교대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여성이 시간외근무를 1년에 1백50시간이상 할 수 없도록 못박고 있다. 여성이 혹사당하는 것을 막자고 만들어 놓은 규정때문에 여성의 고용 자체가 막힌 셈이다.

노동부는“여성의 시간외근무 제한조항을 없애 남성의 근로조건과 똑같게하자고 여러번 건의했지만 여성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여성계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다”고 밝혔다.

여성의 고용을 늘리고,궁극적으로 가장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셈이다.손창희(孫昌熹)한양대교수는“근로시간 제한,유급 생리휴가 보장등 여성 고용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는 법적조항을 점진적으로 폐지하는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여성을 주변으로 밀어내는 기업의 인식이나 사회 분위기도 함께 개선돼야 한다는게 여성계의 주장이다.최명숙(崔明淑)여성노동센터사무국장은“보호장치가 없어지더라도 여성들이 불이익을 안받는 여건이 시급히 마련돼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도 이같은 여성계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여성고용 확대정책을 펴고 있다.현재 취업 경험이 있는 여성을 재고용하는 기업에 장려금을 지급하는것을 골자로한 대책을 마련중이다.98년부터는 50명이상 사업장이 여성근로자의 육아휴직때 장려금을 주도록 조치할 예정이다.

하지만 정부 정책이 만족스러운 수준이라고 보는 시각은 별로 많지 않다.실제로 정부의 갖가지 대책에도 불구하고 기업등 우리 사회 각분야에서 여성 인력을 원하는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기초 조사도 없는 실정이다.

崔사무국장은“남성들이 기피하는 분야의 인력난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정부의 여성고용 정책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며 실효성있는 정부정책을 촉구했다.

여성고용 확대뿐 아니라 교육도 시급히 제자리를 찾아야한다.아무리 소득원이 다양해져도 사교육비 부담이 해소되지 않으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수 없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정부는 사이버 과외,공교육 활성화,평생교육체제등 갖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실효성이 별로 없는 실정이다.

사실 교육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과보호를 타파하는데서 부터 찾아야한다.선진국에선 대학만 가면 돈을 벌어 학비를 대는데 우리는 결혼후까지 부모에게 손을 벌리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이동원 이화여대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부모들 스스로 자식이 독립된 개별 인격체라는 것을 명심하는게 중요합니다.생활비를 보태달라고 친정 부모를 졸라대는 철없는 딸들,사업자금을 왜 안대주냐며 아버지를 닥달하는 아들들은 결국 자식을 상전처럼 떠받들어온 부모들의 잘못된 가정교육 탓”.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인식도 바뀌어야한다.대부분의 가정에서는'남성 일'과'여성 일'이 분명히 나뉘어져 있는데 이제는 이런 구분을 없애고 서로 돕는 가정으로 탈바꿈해야한다는 것이다.그래야 가정이 건강해지고,사회도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끝> 고현곤 기자

<사진설명>

일하는 여성과 청소년들은 아름답다.여성과 청소년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사회는 더 아름답다.이를 위해선 정부부터 실효성있는 정책을 내놓고,가정에선 가족들끼리 서로 이해하고 격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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