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물어뜯는 권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나라 프로권투 초창기인 56년 경주(慶州)에서 미들급 유망주의 경기가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1회전 공이 울리고 몇차례 주먹이 오간 다음 클린치됐을 때 李선수가 상대 金선수에게 귀엣말로“이 곳은 내 고향 아닌가.한번만 봐주게.나도 체면이 있잖아”라고 사정했다.하지만 金선수는 “국회의원에라도 출마할 생각인가.쓸데없는 소리 말고 실력대로 싸워 봐”라고 쏘아붙이며 더욱 거센 공격을 퍼부어 5회 중반 KO승을 거두었다.

두 선수의 경기중 대화는 심판에게까지 들렸으나 심판은 감점(減點)은 물론 경고나 주의조차 주지 않았다.경기중 일체의 대화를 할 수 없도록 규제된 프로권투의 반칙규정을 선수는 물론 심판도 잘 몰랐던 탓이었다.

1886년 현대권투의 기반이 되는 이른바'퀸즈베리 룰'이 만들어진 이후 권투만큼 규칙이 까다로운 스포츠는 찾아보기 어렵다 할 만큼 권투경기의 룰은 엄격했다.20가지가 넘는 반칙조항을 두고 어느 조항이라도 가볍게 위반했을 때는 경고,되풀이하면 감점을 주는 원칙도 철저하게 지켜져 오고 있다.

권투경기의 룰이 이처럼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대로부터 중세까지의 권투가 스포츠라기 보다'죽기 살기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특히 로마시대에는 전쟁포로나 노예들로 하여금 죽거나 불구가 될 때까지 싸우게 해 환호작약하며 즐거워했다니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링 위에 쓰러져 꼼짝 못하거나 피를 철철 흘리는 권투선수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현대인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권투보다 훨씬 위험한'태국식 권투'나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60년대초 일본인들이 개발한'킥복싱'도 이를테면 현대인들의 그같은 잔인성에 영합한 새로운 방식의 권투인 셈이다.

선수들이 반칙규정을 무시하면'죽기 살기의 싸움'에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그것은 이미 스포츠가 아니다.엊그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WBA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귀를 물어뜯는 타이슨의 모습과 피를 철철 흘리는 홀리필드의 모습을 본 권투팬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아무리'화끈한 경기'를 즐기는 팬들이라도 이런 장면에서 쾌감을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다.타이슨은 권투선수가 아니라 추악한 짐승이나 악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