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MB, “우리가 미국 수준 됐나” 뿌리 깊은 정치 불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정치인들에게도 부탁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대통령과의 원탁대화’에서 한 말이다. “위기 때 길거리에 나갈 게 아니라 대화를 통해 토론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다. 그날 그는 정치 얘기를 꽤 했다. 그러나 대부분 비판적인 맥락에서였다.

그는 올 초 국회 폭력 사태를 두고도 “(국회) 회의실 문을 부수는 해머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때린다”고 한 일이 있다. 그의 주변에선 “대통령이 여의도 정치를 불신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고 전한다.

그가 서울시장 때다. 지인들이 정치를 하고 싶다고 하면 “시궁창 같은 데 왜 가려고 하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일화를 전한 측근은 “‘시장님도 정치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잘해보려고 했는데 전혀 아니더라’고 씁쓸해 하더라”고 말했다.

2007년 경선과 대선을 지켜본 한 초선 의원은 “대통령이 늘 하는 얘기가 ‘정치가 참 비효율적’이란 말이었다”고 했다. 대통령이 돼 조각 때 정치인을 발탁하란 요구를 뿌리친 것과 관련, 그와 가까운 한 인사는 “정치인은 엉터리라고 여기더라”고 전했다.

사실 기업인 출신인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우리 역사상 첫 ‘탈(脫) 여의도’ 후보”(중앙대 장훈 교수)라고 불렸다. 정치의 아웃사이더란 얘기다. 기존 여의도의 논리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가 여의도 정치의 문외한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누구보다 더 음습하고 내밀한 경험도 했다. 1977년 35세 때 현대건설 사장이 된 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기업의 대표로 권력의 돌풍 앞에 그대로 노출되곤 했다’(자서전 『신화는 없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권력의 눈 밖에 났다고 수천억원의 세금을 추징당한 일이 그 예다. 작고한 정주영 현대 회장의 말이라며 그는 “정치권에 계속 돈을 대주는데도 경제인들을 무시하는 정치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자서전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을 본다』)고 토로했다. 그와 잘 아는 인사는 “(계약 관계에서 약자인) ‘을(乙)’로서 많이 당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국회의원으로서의 6년 경험도 그의 인식을 바꿔놓진 못했다. 내로라하는 최고경영자(CEO) 출신이었지만 그는 초선 또는 재선 의원에 불과했다. 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뛰어들려는 그를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이 만류했다. YS와의 독대를 앞두고 그는 주변에서 “‘각하,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빌어. 그게 살길이야”란 조언을 들었다. 그는 “돈과 계파, 보스의 눈치만 살펴야 하는 정치인들에게 토론 문화는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의 기본적 사고와 판단력이 필요없었다”고까지 추후 회고했었다.

그는 기업인 시절 당대의 세계 정치 지도자들과 교유했다. 그러면서 “정치는 작고 경제는 큰 나라”를 소망했다. 미국 정치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경이롭다”고 여겼다. 한국 정치와 선진국 정치의 격차를 절실히 느꼈을 법하다. 실제 그는 원탁대화에서 “많은 사람이 미국 정치를 보라는데 우리 정치도 미국 수준에 갔으면 좋겠다”고 꼬집기도 했다. 그의 측근들은 “요즘 국회가 하는 일을 보면 (이 대통령에게) 여의도가 어떻게 보일지 뻔하다”(조해진 의원)고 말한다. 하지만 “정치가 싫어도 정치를 해야 할 자리가 바로 대통령”이란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정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