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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1.KBL을 떠나는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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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97 FILA배 프로농구 출범 기념 리셉션에서 창단멤버였던 이인표, 이충기, 오기택, 필자, 윤세영총재, 권혁철, 한사람 건너 김인건((左)로부터)씨가 한자리에 모였다.

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 남의 얘긴 줄 알았다. 젊은 선수들과 함께 웃고 울며 지내다 보니 나이도 잊어버렸다. 그런데 어느새 칠십의 턱 밑에 와있는 나를 발견했다. 10대 초반 까까머리 중학생 때 잡은 농구공이 그대로 인생의 전부가 될 줄이야. '스타 플레이어'의 화려함도, 태극마크의 뿌듯함도, 우승의 감격도 다 경험했다. 체육 행정가로도 일했고, 한국에 프로농구의 씨앗을 뿌리고 이 정도로 뿌리내리게 하는 데도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내 인생, 이만하면 실패작은 아니라는 생각에 감히 용기를 내어 필을 들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2004년 4월 26일 오전, 서울 논현동의 한국농구연맹(KBL) 회의실. LG와 모비스가 불참한 가운데 8개 구단 단장들이 구단주의 위임장을 들고 왔다. 신임 총재 선출을 위한 총회였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김영수 전 문화체육부 장관을 새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제 나는 자유인이다! 맘껏 여행도 다니고, 글도 쓰고, 부담없이 농구 경기도 즐기면서 볼 수 있게 됐다"라고-.

보람도 컸고 긍지도 느꼈지만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다. 그런 KBL을 막상 떠나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농구협회 이사회에서 맨 처음 프로화를 주장했던 일, 그리고 연구모임과 준비위원회를 이끌면서 숱한 반대와 질시를 견뎌낸 일…. 특히 실업팀에서 막대한 지원금을 받던 대학들은 "김영기가 한국 농구 앞길을 망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처음 프로를 추진했던 1990년대 초반은 이미 시대의 흐름이 프로의 길을 재촉하고 있던 때였다. 내 나이도 50대 후반이었으니 새로운 일에 도전할 만한 패기도 있었다. 어렵사리 프로가 출범한 이후에도 처리해야 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회피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윤세영 초대 총재를 모시며 전무로서, 부총재로서 최선을 다해 프로농구의 반석을 다지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총재를 맡은 이후 내게 주어지는 엄청난 부담은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지난해 12월 경기중단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재직을 사퇴하기로 했다. SBS가 안양 홈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코트에서 철수하면서 발생한 사태는 후유증이 작지 않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만류했지만 나는 사퇴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2003~2004시즌을 마치며 각 구단 단장들은 새로운 총재를 물색했고,결국 프로농구 출범 당시 주무부서 장관이었던 김영수씨를 영입했다. 김 전 장관은 선임 절차가 끝나자 인사차 총재실로 나를 찾아왔다. 윤세영 전임 총재의 서울고-서울대 법대 후배인 그는 KBL 출범 당시 대다수 농구인의 반대로 프로화가 지지부진할 무렵 장관으로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연이 있었다.

"그동안 고생하셨지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인연 깊은 프로농구의 총재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인사를 나눈 뒤 김 전 장관은 앞으로 KBL 상임고문을 맡아 각종 현안에 대한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당분간은 푹 쉬고 싶습니다"라고 완곡하게 사양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과연 내가 농구를 잊고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필자 프로필>

◇약력=▶ 서울 출생(68세)▶ 배재중-고려대-공군-기업은행▶ 농구 국가대표(56~65년)▶ 국가대표 코치.감독(69~74년)▶ 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KOC 부위원장(82년)▶ 한국농구연맹 전무이사(96~99년) ▶ 한국농구연맹 부총재(99~2002년)▶ 한국농구연맹 총재(2002~04년)

◇주요 수상 경력=▶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최우수지도자상(69년)▶ 대통령 표창(69년)▶ 70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체육훈장 청룡장(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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