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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얇아지고 거래 비용.시간 줄어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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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22면

외국에 도착해 공항에서 소액을 현지 화폐로 환전했는데, 예상외로 많은 지폐 다발을 넘겨받았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이 나라 경제가 아직 선진국은 아닌가 보다’ 하는 첫 인상을 갖기 쉽다. 실제로 외국 유명 여행 안내 책자의 한국 소개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국 공항에서 환전해 보면 화폐 최고액권의 액면가가 10달러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두툼한 돈뭉치를 쥐게 된다’는 것이다.

고액권의 사회·경제학

올 상반기 5만원권이 나오면 세계 13위 경제국인 한국을 방문할 때 이처럼 ‘경악’하는 외국인 손님이 줄어들 것이다. 고액권 액면가가 작아 생기는 불편은 한국인에게 더 클 수밖에 없다. 은행권의 최고 액면은 36년간 1만원으로 유지됐다. 그간 물가가 많이 오르다 보니 많은 돈을 갖고 다녀야 했다. 국민 1인당 화폐 발행 장수는 1975년 7장에서 2006년 77장으로 늘었다. 1만원권 여러 장을 들고 다니는 것도 불편하지만 지폐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시간 낭비도 적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만원권 발행은 우선 10만원권 자기앞수표의 제조와 취급 과정에서 생기는 연간 2800억원의 비용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다. 1만원권 수요의 40% 정도가 고액권으로 옮아가면서 연간 400억원에 달하는 화폐 관리 비용도 덜 수 있다. 현재 1만원권이 전체 화폐 발행 잔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금액 기준으로 90%다. 한마디로 1만원권이 너무 혹사당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행 이승윤 발권정책팀장은 “외국의 경우 최고액권이 전체 화폐 발행 잔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0% 정도”라며 “5만원권도 향후 정착되면 그 정도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도 편해진다. 구체적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지폐 휴대 장수가 줄고 입출금과 현금 수수 시 소요 시간도 준다. 10만원권 수표를 쓰면서 이서(裏書)하고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불편도 피할 수 있다. 10만원권 수표의 분실·도난이나 위·변조 사고는 2006년 7만6537장에 달했다. 자기앞수표 발행이 줄어든 만큼 화폐발행액이 늘어나면서 생기는 한국은행의 부수입도 짭짤하다. 독점적으로 화폐를 찍어 생기는 화폐 주조차익(seigniorage)이 연간 1700억원 정도 늘어날 것으로 한국은행은 예상하고 있다.

5만원권이 발행되면 현금인출기(CD)나 자동입출금기(ATM) 사용에 불편은 없을까. 한국은행은 2월에 5만원권 도안이 공개되면 기술지원센터를 설치하고 시중은행의 CD기나 ATM기 개조를 지원해 고객의 불편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모든 CD기나 ATM기가 한꺼번에 바뀌지는 않는다. 시중은행은 고객의 수요를 봐 가며 관련 기기를 교체할 계획이다. 한은 이승윤 팀장은 “은행들이 처음에는 CD기나 ATM의 일부만 개조해 필요한 고객만 5만원권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CD·ATM기 개조 없이 창구에서만 5만원권을 지급하겠다는 은행도 일부 있다”고 말했다.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불법 정치자금 조성이 쉬워지고 뇌물·탈세가 늘어날 수 있다. 정치권 일부와 시민단체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이유로 고액권 발행에 우려를 표시해 왔다. 국가청렴위원회(현 국가권익위원회)는 2007년 고액권 발행으로 생기는 유ㆍ무형의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며 발행 연기를 희망했다. 거액의 현금을 남의 눈을 피해 전달할 경우 산술적으로 지폐의 부피가 예전의 5분의 1로 준다. 국가청렴위는 1억원을 전달할 경우 007가방뿐만 아니라 서류봉투·서류가방·음료박스 등을 모두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불법ㆍ음성거래에 이용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보완책도 나왔다.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은 ‘고액 현금거래 보고 제도’의 기준 금액을 현행 3000만원에서 2010년부터는 2000만원으로 내린다. 은행 창구를 오가는 고액 현금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FIU 이보현 제도운영과장은 “은행 밖에서 돌아다니는 고액 현금을 감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은 이내황 발권국장은 “일부 우려할 점도 있지만 우리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고액권 발행의 긍정적 측면이 훨씬 크다”며 “세무 행정과 기업회계가 개선되면서 자영업자의 매출 누락이나 기업 비자금 조성 등 음성 거래도 줄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인플레 기대심리를 자극해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도 고액권 반대의 이유였다. 경제 주체들이 돈의 값어치가 떨어진 것으로 오인해 지출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양대 하준경(경제학) 교수는 “유로를 도입할 때도 최고액권이 커진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이런 우려가 나왔지만 별 영향은 없었다”며 “현금만 갖고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지출을 늘리는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요즘처럼 디플레를 걱정해야 할 시기에 물가 걱정은 한가로운 얘기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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