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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산유국을 선진국이라 안 하는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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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35면

아프리카 수준의 가난에서 출발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우리나라는 항상 ‘선진국’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살아왔다. 모든 후진국이 ‘선진화’를 원하지만 주요 정당 이름에 ‘선진’이라는 말이 들어갈 정도로 ‘선진화’에 대한 열망이 큰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진국을 정의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이다. 소득 수준이 중요한 지표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소득이 높은 중동 산유국들을 아무도 선진국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부(富)가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자리 잡고 살던 ‘조상 덕’에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소득·기술력 등 경제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선진 사회’가 되는 데 ‘화룡점정(<756B>龍點睛)’을 해 주는 것은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아주 가난한 나라만 아니라면 후진국에도 잘사는 사람이 많다. 사실 그들은 선진국보다 소득세율도 더 낮고 탈세도 더 쉽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만큼 세금도 많이 안 내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가정부·운전기사 등을 많이 부리면서 살기 때문에 비슷한 명목소득을 가진 선진국 사람들보다 생활 수준이 훨씬 높다. 따라서 선진국과 후진국을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다 같이 잘산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선진국의 가난한 사람도 후진국 기준으로 보면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린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구조적으로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선진국들은 복지국가의 목표 아래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 생활을 보장한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나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위해 보도의 턱을 깎고, 모든 공공시설·문화시설·대형 매장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쉬운 문과 승강기, 그리고 그들을 위한 화장실을 따로 설치해 놓았다. 아직은 법도 완전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많지만 소수 인종·여성·노인·성적 소수자 등의 차별을 방지하는 제도도 많다. 수도(首都)와 지방의 생활 수준 격차도 아주 크지 않으며, 지방도시나 농촌에 가도 규모는 작지만 수도나 대도시에 부럽지 않은 편의시설과 문화시설이 마련돼 있다.

물론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다. 중앙집권의 전통이 깊은 영국은 수도 런던과 지방의 격차가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큰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노르웨이·스웨덴 등 북구 국가들에 비하면 이탈리아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제약이 많고 육아시설도 뒤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소위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후진국에 비해 약자에 대한 배려가 깊다. 많은 유럽 사람이 미국을 좀 ‘야만적인’ 나라로 생각하는 것은 문화적 우월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미국은 전 국민 의료보험도 없는 ‘잔인한’ 사회라는 데서 기인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여 년간 평균소득은 좀 늘었지만 (그것도 옛날에 늘던 속도에 비하면 매우 느린 것이다) 선진화가 되기보다 도리어 후퇴한 면이 많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약육강식 논리에 기초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복지제도는 조금 개선됐지만 아직도 사회복지 지출이 국민소득에 대비할 때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그렇지 않아도 50% 이상으로 높았던 비정규직 비율이 60% 부근으로 높아졌고, 정규직도 해고 위험이 유례없이 커졌다.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앞다퉈 ‘자격증’ 덕택에 해고를 당해도 고수익 자영업을 할 수 있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 하는 것은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얼마나 불안해졌는지를 웅변으로 말해 준다. 이러다가 급기야 최근에는 용산 지역에서 밀어붙이기식 재개발을 강행하다가 6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까지 벌어졌다.

1960년대부터 50여 년간 허리띠 졸라매고 독재에 시달리며 경제발전을 해 온 것은 선진국이 돼 다 같이 잘살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의 시계는 거꾸로 돌면서 점점 더 각박해지고 약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 상황을 초래한 신자유주의가 그 본산지인 미국·영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후퇴하고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가.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선진화’를 하려는 것인지 깊이 성찰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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