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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로 일궈낸 IT 초강국의 유전자는?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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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세계에서 가장 큰 대국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사이에 끼인 한국. 지난 5000년의 역사 동안 수 없이 많은 외침을 견뎌내며 지금까지 왔다. 온 세계가 유례 없던 금융위기에 직면한 지금. <월스트리트저널>은 인도·중국과 함께 한국을 새로운 투자유망국가로 지목했다. 10년 전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근성 있게 다시 일어선 한국인의 힘, 그 원천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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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의 한파가 한창이던 1998년 1월 한 회사에서 사내 금모으기 운동을 실시했다.

“앞으로 태극마크를 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유목민족의 진취성·호전성+농경민족의 교육열·탐구심… “한국의 시대 새로 열린다!” #한국인의 DNA 특질 집중탐구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박찬호가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좀 더 자리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 태극마크를 포기하겠다고 밝히던 그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WBC(Wordl Baseball Classic)에서 보여줄 그의 활약을 기대했던 팬들 역시 아쉬움 속에 그를 떠나 보냈다. 박찬호도 울고, 팬들도 울었던 기자회견.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신화를 일궈냈던 히딩크 감독도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자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열성적으로 임하는 모습에 놀랐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비장하고 숙연해지는 것이 한국인의 특징이다. 마치 DNA가 꿈틀대며 반응하듯 한국인들은 서로의 피에 반응하고 이끌린다. 뭉쳐서 거대한 하나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은 하나의 큰 가정과 같이 온 국민이 나라 일을 자신의 집안일처럼 여긴다.”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장흥제의 <중국이 한국인보다 무엇이 모자란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스포츠는 극적이고 감동적 요소 때문에 쉽게 몰입하고 동조하게 된다. 올림픽에 온 세계인이 주목하며 모국의 성적표에 울고 웃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했던 한국인의 모습은 10여 년 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외환위기 때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펼쳐졌던 ‘금 모으기 운동’에서 2개월 동안 350만 명이 참여해 225t의 금붙이를 모았던 것이다.

나라를 위해 재산 내놓는 국민성

세상 어느 나라 국민이 국가의 위기 앞에 자기 재산을 내놓으려고 할까? 한국인의 내면에는 이처럼 매우 강렬한 운명공동체 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상황이 일부 경제권역에서 벌어진 긴급상황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혹자는 “예전에는 나라가 어려우면 외국으로 이민갈 궁리라도 했는데…”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위기는 거꾸로 기회로 다가올 수 있다. 애국심과 단결력이 융화돼 결정적 순간 놀라운 에너지를 배가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면 가능하다. 기자생활을 거쳐 청와대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으로 일하는 함영준 씨는 2006년 펴낸 자신의 저서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에서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서 일하는 아시아 경제통 앤디 시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던 시에가 한국예찬론자로 돌연 선회한 것이다. 2005년 말 홍콩에서 벌어진 한국 농민들의 세계무역기구(WTO) 반대시위를 목격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시위에 대한 찬반을 떠나 그는 한국인들의 단결력과 단체문화에 놀랐다고 한다.

“나는 탁월한 조직력과 응집력으로 이뤄진 시위문화를 봤다. 이런 훌륭한 조직화로 한국기업은 중국시장을 공략했다.”

함씨는 “그가 감탄한 것은 공동의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뭉치는 힘,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할 줄 아는 헌신적 자세였다”고 분석한다. 특히 위기가 닥칠 때 공동체 의식은 새로운 에너지의 원동력이 돼 분출하기 때문에 나라가 없어질 뻔했던 수많은 고비에 직면해서도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인이 한국인을 보는 시각에는 이와 정반대의 의견도 있다. 한국사람들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견해다. 일본의 외신들은 “한국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때 놀라운 질서와 친절을 보여줬지만, 행사가 끝나자마자 질서의식은 사라졌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길에서 자주 부닥치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비 온 뒤 굳어진 땅처럼 단단하게 하나로 뭉쳐 응원하던 한국인들이 돌아서기만 하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서로 밀치며 군중 속을 나아가는 풍경. 분명 외국인들에게는 생소하고 기이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이면에는 시기심 많고 탐욕적인 기질이 숨어있다.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인협회 명예회장은 청와대 직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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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에는 전사의 기질이 남아있다. 2008베이징올림픽 펜싱 은메달리스트 남현희 선수(왼쪽)의 경기 장면.

“한국인들은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정서부터 바꿔야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심각한 경쟁 심리와 질투심을 드러내는 속담이다. 거리마다 명품을 가장한 ‘짝퉁’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도, 우리 아이를 옆집 아이보다 더 비싼 학원에 보내려는 것도 특유의 경쟁심의 발로다. 외국인들은 남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담담하게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눈으로 보면 ‘남보다 더’를 외치며 악다구니를 쓰는 한국사회가 유별나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불공평한 사회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이원재 씨가 쓴 <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중산층이 어느 나라보다 두텁고, 이들 간의 소득수준과 소비수준이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니계수는 한 나라의 소득분배를 특정하는 지표로,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게 분배된 상태를 나타낸다. 가처분소득 기준으로 우리나라가 2006년 0.311이고, 같은 시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평균은 0.312이다.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해 우리나라의 상황은 결코 나쁜 편이 아니다. 30개국 중 17번째이기는 하나 미국·이탈리아·스페인 같은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낫다.

이원재 씨는 좁은 국토에 너도나도 차를 사던 ‘마이카 열풍’도, 비싼 휴대전화 척척 바꿔대는 소비행태도 비교적 균등한 소득수준 덕분이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양면성이다. 베인&컴퍼니의 이성용 대표는 “한국인의 속은 자본주의자면서 겉으로는 사회주의자 같이 행세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누구보다 잘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면서 뿌리깊이 박힌 유교적 의식관은 물질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게 만들었다. 부자를 시기하고 잘사는 남을 시기하는 습성은 이 두 가지 양면적 요인이 결합해 치열한 경쟁의식을 낳았다. 그런데 탐욕스럽고 시기심이 많다고 해서 ‘어글리 코리안’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함영준 씨는 “오히려 한국인의 유별난 시기심과 경쟁심은 축복”이라고 말한다. 단시간 안에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저력이 ‘잘살아보자’는 열망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이는 없다. 한국의 산업현장 곳곳에 적혀 있는 ‘Best’라는 단어, 유치원 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는 아이들. 자신의 처지보다 못한 사람을 보기보다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보며 부러워하고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는 한국인들이다. 좋게 보면 ‘아름다운 시기심’이다.

<뉴욕타임스> 최고의 아시아 통으로 꼽히는 나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중국이 미국 된다>는 자신의 저서 한국판 서문에서 각국 사람들의 기질을 재미있게 표현한 유머를 소개했다. “미국인 두 사람이 한 방에 같이 있으면 법적 고소가 자주 일어나고, 중국사람들은 장사를 위한 흥정을 벌이고, 일본사람들은 친절한 인사를 해댄다. 아마 한국인들은 싸움질을 시작할 것이다…. 한국인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거칠고, 쉽게 흥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박미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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