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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食君子’핏물 보이는 날고기 쌓기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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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하면 떠올리는 또 다른 이미지는 종부의 ‘손맛’이다. 그러나 종가 제사상에서 맛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모양새’다.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들 집안인 만큼 제물의 큰 종류나 가짓수는 가능한 한 예서(禮書)의 틀에 충실하려 한다. 그런 가운데 지역이나 집안 가풍에 따라 구체적 품목이나 차림새는 차이가 있다. 예서에 구체적인 음식 품목까지 제시돼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각 종가에서 대대손손 가장 신경을 써서 모시는 불천위 제사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생물(生物)을 올리는 적(炙)이다. 생선·쇠고기·닭고기 등을 손질만 한 채 날것으로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기제사 때는 종가에서도 날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한국국학진흥원의 김미영 박사는 “옛날부터 제물의 가장 큰 의미는 ‘희생’이었다”며 “집단적으로 올리는 제례 때 ‘피’를 올리던 것이 사적인 제례에서 날고기로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주자가례' 이전의 예서인 '예기'에도 ‘가장 숭상하는 제사에는 ‘(피)냄새’로 제를 올린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덧붙였다. ‘혈식군자(血食君子)’란 말도 있다. 그래서 대(大)유학자들을 모신 서원에서 지내는 제사는 특히 이 원칙에 철저하다고 한다.불천위제는 그 집안에서 가장 존경하는 조상을 모시는 것인 만큼 날고기를 올리는 전통을 유지한다. 요즘엔 제례 후 함께 음복하기 위해 익혀 올리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특히 안동지역에서는 지금도 날고기를 사용한다.

날고기를 올릴 때도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방에서는 어적·육적·계적을 따로 올리지 않고 한꺼번에 쌓아올린다. 이를 ‘도적’이라고 한다. 김 박사는 “'주자가례'에는 ‘삼적’을 따로 내도록 제시돼 있는데,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한 틀에 한꺼번에 높이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땅이 비옥해 살림이 풍족했던 호남지방은 날고기를 사용하는 적은 따로 내고, 예전에는 귀했던 기름에 지진 각종 전을 높이 쌓아올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김 박사의 견해다.

일반 기제사에서도 적이나 전·탕 등은 대개 세 종류의 고기로 만든다. 어류와 육류·조류 세 가지를 갖추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한꺼번에 쌓을 때는 위에서부터 ‘깃털-털-비늘[羽毛鱗]’ 달린 짐승 순서다(문어를 올릴 경우 쌓기 힘들어 맨 위에 놓는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늘-땅-바다로 구성된 우주에서 왔다는 뜻이다.

영남지방에서는 상어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돔배기’나 고래고기를 어적으로 올리기도 한다. ‘치’자가 들어간 생선류는 절대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종가도 있다. 경북 경주의 양민공 손소 종가는 계적으로 수탉을 통째로 삶아 놓는 것이 특이하다. 머리와 닭발을 잘라내지 않고 몸 전체를 사용하며, 닭 형태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30㎝ 정도 되는 대꼬지로 머리가 꼿꼿이 서게끔 받쳐 삶는다.

또 하나 제사상에 공통적으로 올라가는 음식 중의 하나가 식혜다. 원래 예서에 나와 있는 식혜는 우리가 요즘 먹는 것과는 다른 음식이다. 밥을 엿기름에 삭혀 달착지근하게 만든 음료수가 아니라, 밥을 새콤하게 약간 발효한 것이다. 물론 요즘엔 대개 음료수 식혜를 만든 뒤 밥알만 건져 올려 놓는다. 고명으로 대추 저민 것이나 북어포·육포 등을 조그맣게 잘라 올리는데 특별한 유래는 없다.

이 밖에도 지역 특산물이나 조상의 생전 기호에 따라 올려 놓는 음식이 많다. 죽전 박광정 종가 등 전남 지역에서는 벌교 특산물인 꼬막을 제사 음식으로 많이 사용한다. 장성군의 하서 김인후 종가에서는 꼬막을 ‘해과(海果)’로 여겨 과일열에 놓기도 한다. 남해안과 인접한 호남 종가에서는 꼬막과 유자 외에도 경상도나 경기도 등에서는 포로 잘 사용하지 않는 상어포를 볼 수 있다.

‘비자강정’은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종가만의 독특한 제사 음식이다. 고택 뒤 산자락에는 직경 1m에 300년 이상 되는 비자나무 5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 비자나무 열매가 강정의 주재료다. 비자의 독특한 향과 쌉싸래한 맛이 달달한 강정과 잘 어우러진다. 비자강정 제조법은 이 집안 종부들에게만 전수되는 비법이라 한다.
경북 성주의 응와 이원조 종가에는 응와 선생이 생전에 즐겼다는 ‘집장’을 해마다 불천위 제사상에 올린다.

곱게 빻은 메줏가루에 찹쌀풀·간장·조청을 넣어서 버무린 다음, 소금에 절인 가지·박·고추·부추 등의 야채를 박아 만든 음식이다. 항아리에 담아 종이·짚·솔가지·겨 등을 이용해 24시간 동안 불을 피워 띄우는, 보기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음식이다.경북 봉화의 충재 권벌 종가에서는 편을 올릴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시루떡 대신 ‘골비떡’이라고 부르는 작은 크기의 절편(잔절편)을 사용한다. 어른 새끼손가락 크기의 잔절편을 반으로 접고 비벼서 올챙이처럼 만든 것이다. 편편한 시루떡에 비해 골비떡을 높게 쌓아올리려면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하다.

안동 하회마을의 서애 류성룡 종가에서는 ‘중개(仲介)’라는 일종의 유과를 불천위제 때마다 올린다. 궁중의 중박계(中朴桂)가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 중개는 서애 선생의 생존 당시 기호음식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사상에서 술을 또 빼놓을 수 없다. 대구의 한훤당 김굉필 종가의 전통 가양주는 국화주다. 섣달에 담가 정월 제사에 쓴다. 정원에서 직접 재배한 황국을 재료로 하여 담고, 장독대에는 국화주 전용 항아리도 있다. 이 종가는 화전에도 독특하게 장미꽃을 사용한다. 화단에 노란 장미꽃을 심어놓고 가을 제사 때 쓴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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