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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카를로스 곤 日 닛산 자동차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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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 카를로스 곤 닛산자동차 사장이 최신 모델인 2004년형 뉴 페어레이디 350Z 앞에 서 있다.

카를로스 곤 사장은 6600억엔의 적자를 기록하며 파산위기에 몰렸던 닛산(日産) 자동차를 불과 2년만에 3311억엔의 흑자기업으로 돌려놨다.2001년 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그에게 쏟아졌던 ‘프랑스 용병’이라는 비아냥이 말끔히 사라졌고 대신 ‘구조조정의 전문가’로 평가받으며 그의 새로운 리더쉽은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곤 사장은 본지와 가진 e-메일 인터뷰에서 구조조정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위험을 직감했을 때 즉시 단호하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답했다.그는 “위기의 순간에 움직이지 않으면 상황은 악화된다”며 “힘든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시간을 이겨내면 당신을 부자로 만든다”고 강조했다.

곤 사장은 또 “북미시장에서 고급 브랜드로 성공한 인피니티의 세계화의 출발점으로 한국시장을 선정했다”며 “인피니티는 고급차의 경쟁이 심한 미국에서 15년간 경쟁력을 갖춰왔다”고 자신했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 언어나 문화 면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의사소통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주의 깊게 듣고 내 의사는 되도록 간단하고 명료하게 전달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게 했다."

-닛산의 부활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한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닛산이 짧은 기간에 궤도에 오른 것은 전 사원이 의욕을 갖고 재건 계획에 참여해 공헌한 결과지 인간 능력을 초월한 기적은 아니다. 성공이 보장됐던 것은 아니지만 예상됐던 결과다. 나는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닛산에 처음 왔을 때의 상황은 어떠했나.

"한마디로 '혼란'이었다. 직원들은 전략도, 업무의 우선순위도, 목표도 없이 그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혼란을 불식시켜 회사가 나갈 방향이 무엇이고, 개개인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명확히 해주는 게 급선무였다."

-혼란스러웠던 닛산을 82억5000만엔(2003회계연도)의 영업이익이 나는 회사로 바꿔놨다. 닛산이 변신에 성공한 비결은.

"나는 대부분의 경력을 위협받거나, 위험에 처해 있거나, 또는 실패를 경험한 상황 속에서 쌓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위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위험 상황에서는 가장 빨리(rapid) 움직여야 한다. 성공 여부는 얼마나 속도감 있게 결정하고 추진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면 브라질이 1000%의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모든 제품 가격이 정부의 통제에 놓였을 때가 있었다. 파산의 위협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1000%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5~6%의 운영이익을 낼 때 일주일씩 결정을 미루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또 나는 1991년과 92년에 걸쳐 미국 경제가 불황일 때 미쉐린과 유니로열-굿리치를 합병시켰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지만 그때도 빠른 일처리 때문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리더의 역할은.

"리더에 대한 기대감은 위기 국면에서 고조된다. 조직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조직원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

-업무를 빠르게 추진하다 보면 직원들의 불만은 없나.

"그렇지 않다. 회사의 성공에 기여하는 것은 동기 부여이지 지치는 일이 아니다. 회사의 실적에 기여하는 것은 에너지의 원천을 창조한다. 빠르게 성장하고 움직이는 한 지치지 않는다. 한가지 기능이나 목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닛산의 빠른 변화 또한 나에겐 놀라운 것이라기보다 편안한 것이었다. 또 속도 있게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회사 안의 세 가지 레벨의 인재들-직원.중간경영자.최고경영자-에게 회사의 우선 순위와 목표를 충분히 이해시키는 것이 전제 조건이다."

-레바논 이민자 3세로서 브라질에서 태어나 미국.일본 등에서 일하고 있다. 국적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다. 교육은 레바논과 프랑스에서 받았다. 브라질과 미국.프랑스, 그리고 일본에서의 업무경력은 다문화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일하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나는 한번도 어떤 틀에 갇혀 본 적이 없다. 나는 레바논인이고 프랑스인이며 동시에 브라질인이다. 스스로를 그 모든 요소들의 혼합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닛산의 구조조정이 성공했다는 분석도 있다.

"외국인이라는 점이 유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외국인은 실패하기 쉽다. 중요한 것은 외국인(foreigner)이 아닌 외부인(outsider)의 역할이다. 외부인들은 내부의 과거와 연결돼 있지 않다. 외부인들은 기존의 실패와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쇠퇴의 길을 계속 가기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래서 내부인보다 외부인이 변화 시기에는 적합할 수 있다. 나는 외국인이 아닌 외부인으로서 닛산의 개혁을 이끌어냈다."

-2005년 4월부터는 르노와 닛산의 CEO를 겸임한다.

"99년에 르노를 떠나 닛산으로 이동했다. 현재까지 유일한 책임은 닛산을 잘 이끄는 것이다. 르노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상황은 아직 아니다. 르노의 CEO가 되는 시점에는 다시 처음부터 하려고 한다. 어떤 선입견이나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르노에 갈 생각은 없다. 단 내가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 직책을 받아들였다."

-내년 중반부터 인피니티가 한국에도 진출한다.

"닛산은 수많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닛산의 최고급 브랜드 인피니티의 세계화다. 한국시장 진출은 인피니티의 세계화의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북미 시장 밖에서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인피니티 네트워크를 한국시장에 구축하려고 한다. 그 후 일본과 중국.러시아.서유럽 등을 공략하겠다."

-닛산 차 중 가장 좋아하는 차는 어떤 것인가.

"이미 많은 상을 받은 350Z 컨버터블을 좋아한다. 이 차는 닛산 성공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능과 기술력에서 매우 훌륭하다. 그 다음으로는 패스파인더 아르마다를 매우 좋아한다."

장정훈 기자

[닛산은] 90년 역사 자동차社…日 구조조정 대명사

닛산자동차는 도요타와 함께 일본의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 가는 두 견인차 중 하나다. 1914년 가이신샤(快進社)의 설립자 하시모토(橋本增次館)가 일본 국산차 1호인 닷토를 만들면서 자동차 회사로 출범했다. 이후 아유가와 요시스케(鮎川義介)가 닷토를 인수해 34년에 사명(社名)을 현재의 '닛산(日産自動車工業株式會社)'으로 바꿨다.

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 미군으로부터 군용트럭을 대량 주문받아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닛산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계속된 장기 불황 속에서 최대의 적자를 내며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99년 르노와 손잡고 일본 풍토에서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구조조정을 벌여 회생에 성공했다. 2003회계연도에는 82억5000만엔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세계 10개국에 공장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해 305만7000대를 판매했다.

르노삼성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고 있으며 지난 3월 판매법인인 닛산코리아를 설립, 내년 중반부터 최고급 브랜드인 인피니티를 본격 시판한다.

[카를로스 곤 사장은] '비용 절감기' 별명…CNN 선정 CEO 1위

카를로스 곤 사장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최고경영자로 꼽힌다. 브라질.미국.일본을 넘나들며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떠맡아 구조조정을 통해 정상의 기업들로 일궈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미국 타임과 CNN방송이 선정한 '올해의 가장 영향력 있는 최고경영자 25인'에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곤 사장은 브라질에서 태어나 레바논과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어머니는 프랑스인이고 아버지는 브라질인이다. 곤 사장은 프랑스에서 대학을 졸업한 1978년 타이어 업체 미쉐린을 첫 직장으로 택했다. 공장 종업원으로 시작해 20대 후반에 공장장을 거쳐 30대 초반에 미쉐린 브라질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쉐린의 브라질 지사를 4년 만에 안정궤도에 올려 놓고 미국.캐나다.멕시코를 통합하는 북미지역 사장에 올랐다.

곤 사장은 96년 미쉐린에서의 보장된 자리를 버리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프랑스의 르노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르노의 남미지역 담당 부사장에 취임해 5개월 만에 200억달러의 비용삭감 계획을 밀어붙여 성공했다. 이때부터 '코스트 커터(cost cutter. 비용절감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곤 사장은 2001년 당시 파산 위기에 몰렸던 르노계열의 일본 닛산자동차에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당시 사원들에게 '불타는 갑판론'을 내세우며 '살기 위한 선택지는 단 하나, 바다에 뛰어드는 것뿐'이라며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사원은 물론 일본 사회도 외부인인 곤 사장에게 냉담했다. 곤 사장은 그러나 특유의 추진력으로 속도감 있게 닛산에 대한 대수술을 감행했다. 2년간 2만1000명을 감축하고 20개 판매회사의 사장을 교체했으며, 공장 다섯곳의 문을 닫았다. 닛산은 곤 사장이 취임한 뒤 2년 만에 성장기업으로 거듭났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평가했고, 일부에서는 '불황의 늪에 빠졌던 일본 경제를 건져내고 있는 일등 공신'이라는 극찬도 마다하지 않았다.

곤 사장은 또 일본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일하는 남미의 열정을 지닌 CEO'로 통한다. 하지만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것은 월요일 오전부터 금요일 오후까지만 해당된다"며 "나의 주말은 오직 가족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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