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연구개발 투자 줄이기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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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불황 때문에 기업들이 연구개발(R&D) 투자를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기업보다 어려움이 심한 중소기업들이 R&D 투자를 크게 삭감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산업기술재단은 22일 전국 1103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연구개발(R&D) 지수’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 지수가 100보다 크면 R&D 투자액이나 연구 인력을 전년 동기보다 늘린 기업이 많다는 뜻이고, 100보다 작으면 줄인 기업이 더 많다는 의미다.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R&D 투자 지수는 93.4였다. 산업기술재단이 R&D 지수를 파악하기 시작한 2004년 3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특히 중소기업의 R&D 투자 지수는 92.4에 그쳤다. 경기 침체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한 R&D 투자를 깎은 기업이 많다는 얘기다. 올 1분기 R&D 지수 전망치도 95.1로 다수 업체들이 지난 분기에 이어 R&D 투자를 계속 줄이겠다고 답했다.

내수에 의존하는 기업들이 R&D 투자를 많이 줄였다. 100% 내수 기업의 R&D 투자 지수는 지난해 4분기에 87.0을 기록했다. 수출이 전체 매출의 50% 이상인 기업의 R&D 투자 지수는 94.1이었다. 기업들은 R&D 투자를 줄이는 가운데서도 연구 인력은 계속 확충하는 모습이었다. 연구 인력 채용 지수는 지난해 4분기에 105.5이고, 올해 1분기 전망치는 109.6이었다.

연구비 구하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추세다. ‘연구비 조달 환경 지수’ 는 지난해 4분기와 올 1분기(전망치) 모두 81.9였다. 한국산업기술재단의 홍성민 동향분석팀장은 “불황에 자금 경색이 겹치면서 기업들이 R&D 재원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R&D 투자를 줄이면서 정부의 신성장동력 육성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신성장동력 중 태양광·그린카 같은 그린에너지 분야에 집중 투자해 2012년까지 선진국 기술 수준을 따라잡는다는 청사진을 22일 발표했다. 정부가 이 분야 R&D에 올해부터 2012년까지 1조8000억원을 투입하고, 기업들이 4조2000억원을 쏟아붓는다는 전제하에 마련한 로드맵이다. 그러나 기업이 R&D 투자를 줄이는 상황이어서 정부가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홍성민 팀장은 “국내 전체 R&D 금액의 75%에 달하는 민간 투자가 위축되면 산업 경쟁력이 타격을 입는다”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정부가 한시적으로라도 R&D 투자에 대한 감세 폭을 넓히는 등의 투자 유인책을 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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