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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세계, 변화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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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버락 오바마는 그가 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 현재 미국이 처한 상황을 구름이 몰려오고 태풍이 광란하는 이미지로 묘사했다. 그의 현실 진단은 영하의 워싱턴 날씨처럼 냉엄했다. 그는 미국이 지금 위기를 맞은 것은 탐욕과 무책임한 행동의 결과이며, 새 시대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에 집단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는 앞선 세대들은 미사일과 탱크가 아니라 튼튼한 동맹과 지속적인 확신을 무기로 파시즘과 공산주의와 대결했다는 말로 조지 W 부시 정부의 힘에만 의존한 일방주의 대외정책을 비판했다. “앞선 세대들은 힘만 가지고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것, 우리의 안전은 명분의 정당성과 겸손과 자제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오바마는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에서 링컨 기념관까지 길게 뻗은 워싱턴 몰을 가득 메운 100만 군중을 향해 세계가 변했으니 미국도 변해야 한다고 외쳤다. 변화의 목적으로 그는 평화의 새 시대와 책임의 새 시대를 들었다. 케냐인 아버지한테서 태어나 몸속에 다인종·다문화주의의 피가 흐르는 오바마는 잡동사니의 유산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라고 말했다. 그런 문화적·가정적인 배경에 기대어 오바마는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가르는 대외정책과 결별하고 모든 인종·종교·이념을 가진 나라와 국민을 포용하고 평화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左)이 20일 링컨 대통령이 1861년 취임식 때 사용한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워싱턴 AP=연합]


오바마는 시장과 정부의 기능에 관한 언급에서 진보적인 자유주의 정치인의 진면목을 보였다. 그는 말했다. “부(富)를 창출하고 자유를 확대하는 시장의 힘은 아무도 못 당한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시장은 감시의 눈을 벗어나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혜택을 돌리는 시장으로는 미국의 번영은 오래갈 수 없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는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는 말로 큰 정부에 반대하고 작은 정부를 옹호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정부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느냐가 문제라는 말로 레이건의 보수적인 작은 정부론을 비판했다. 그것은 단기적인 경제위기 해결과 장기적인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해 큰 정부에 의한 케인스주의적 개입 정책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발언으로 주목받을 만하다.

예상과 달리 오바마는 그의 영웅들인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인용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이 안전을 위해 이상을 버리는 선택을 “허위”라고 배격했다. 그는 아직도 이상이 세상을 밝게 비춘다고 말하고 편의를 위해 이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평화와 존엄성이 보장된 미래를 갈망하는 모든 국가, 모든 국민, 여성과 아이들의 친구라고 말하고, 미국은 다시 한번 세계를 리드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는 미국을 새로 만들자(Remake)고 역설했다. 그는 박력 넘치고 비전 있는 젊은 지도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미국이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오바마 취임식은 정권이 바뀌는 것 이상으로 문화와 가치와 관행과 역사가 바뀌는 대장정의 출정식이었다. 성패는 모른다. 그러나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인들의 기적 같은 지혜와 오바마의 다채로운 출생·성장 배경이 지구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변화의 저력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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